정부는 오는 23일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IMF 차입금 1억4천만달러를 갚는다. 지난 97년말부터 들여온 IMF 보완준비금(Supplemental Reserve Facility) 1백35억달러와 대기성차관(Stand-by Loan) 60억달러의 마지막 상환분이다. 2004년 5월까지 갚기로 했던 돈을 3년이나 앞당겨 갚는 것이다. 지표로만 보면 우리는 분명히 해냈다. 외환보유액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중이고 순채권국으로 바뀌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국가신용등급도 투자적격으로 정상화됐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반드시 변해야 할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새로운 문제들을 잉태하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4년 전 97년 여름. 태국에서 발생한 환란(煥亂)태풍은 인도네시아를 거쳐 서서히 북상해 왔다. 특급 태풍이었지만 당시의 한국호(號)는 "태풍의 진로가 우리쪽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예보만 내보내고 있었다. 홍콩이 한바탕 태풍에 휩쓸리고 주변의 파도가 거세졌는데도 정부는 "선체가 튼튼하니 걱정할게 없다"고 소리쳤다. 기업과 금융사들은 "우리 배가 설마 침몰하겠나"며 자위하고 있었다. 모두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 외국인들은 삼삼오오 구명정에 몸을 싣고 떠나갔다. 그해 12월. IMF 동앗줄에 매달려 간신히 침몰을 면한 한국호는 만신창이였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주제 넘게 뚱뚱하다"는 비난속에 IMF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했고 상당수가 이를 견디지 못해 쓰러졌다. 썩어들어가는 기업에 돈을 퍼줬다는 이유로 많은 금융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금반지를 팔고 팔을 걷어붙인채 난파선을 고쳐갔다. 그러기를 3년8개월. 우리는 이제 바로 그 IMF에 졌던 빚을 모두 갚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돈을 갚을만한 능력을 회복했다. 97년 12월18일 39억달러에 불과했던 가용 외환보유액은 지난 7월말 9백70억달러로 늘어났다. 환란의 직접 원인이었던 단기외채는 97년말 외환보유액의 7배(7백14%)에서 지금은 절반(6월말 43.6%)을 밑도는 정도다. 환란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고 심판대에 올라야 했던 기업과 금융도 크게 달라졌다. 기업은 재무구조, 투명성, 상호채무보증,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 등 여러 분야에서 개선이 이루어졌다. 재무구조가 나빴던 대우 쌍용 고합 등 1백4개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나머지 그룹들도 주채권은행과의 재무구조개선약정을 통해 부채를 줄였다. 금융회사들은 무더기로 폐쇄되거나 통폐합됐다. 동화 경기 충청 등 11개 은행과 고려 동서 한남 등 6개 증권사, 동아 한덕 등 13개 보험사를 포함한 부실금융회사 6백85개가 합병되거나 자산부채이전, 청산 방식으로 정리됐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합병(한빛은행)됐고 제일은행은 해외에 매각됐다. 환란 이후에 불어닥친 변화는 분명 엄청났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밀린 빚을 모두 갚게 되는 이 순간 왜 우리는 잔치기분을 느끼지 못하며, IMF를 졸업한다는 이 순간 경제계에 다시 번지고 있는 위기감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기업은 비계덩어리를 빼내고 탄력있는 근육을 만들었는지, 금융은 옥과 돌을 구분할 만큼 심미안을 확보했는지, 정부는 얼마나 개혁됐는지에 대해 지금 우리는 답을 내놔야 할 순간을 맞고 있다. 숫자로 입증되는 성공의 이면에 어떤 실패와 잘못들이 숨겨져 있는지 우리는 냉정하게 되짚어 봐야 할 때가 왔다. 단순히 대우자동차 하이닉스 서울은행 등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는 상항의 불리함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개혁은 맴돌고 더욱이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부는 더욱 막강해지고 시장경제는 갈수록 위축되는 것은 아닌지 총체적인 반성이 필요한 때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