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노인 한 분이면 꽉 찰 정도로 길이 좁아 그리 부르게 됐다는 전남 무안 일로(一老)에서의 낯선 하룻밤. 한낮의 막바지 무더위를 피해 서둘러 길을 나선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 더 깊은 하늘에선 도심에서와는 다른 또렷한 별빛이 쏟아진다. 우유, 신문배달원의 자전거 페달소리, 환경미화원의 빗질소리 사이사이로 우물속 같은 침묵이 일렁인다. 대중교통수단은 없는 시간. 복룡리쪽 포장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1시간쯤 걸었을까, "붕, 붕" 생전 처음 듣는 이름모를 양서류의 울음소리, 양옆의 논에 늘어선 이런저런 모양새의 허수아비들이 순간순간 오싹하게 만든다. 무안~일로 도로가에 핀 외래종 다년생 코스모스의 주황색 꽃잎이 주는 이질감과는 또다른 느낌이다. 죽음과 재생의 통과의례에 든 듯 걸음걸음이 조심스럽다. 어둠은 그 의례를 위한 성스러운 공간. 끝에는 오늘의 목적지, 회산백련지가 자리하고 있다. 길은 뜻밖에도 친절해 중간중간 연꽃이란 큼직한 글씨가 바닥에 보인다. 하얀 연꽃의 이미지는 이 모든 잡생각과 절묘히 맞아떨어진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 석가는 연꽃 위에서 탄생했고 마야부인이 몸을 풀때 오색 연꽃이 피었다는 인연에서 깨달음과 빛,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속된 인간조건에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과 수단의 결정체이며 안내자로서의 연꽃이 거기 있는 셈이다. 먼 오른편 구릉과 빙둘러쳐 진 안개 너머로 하얀 아침 해가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게 또렸해질 무렵, 방죽에 오르자 정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온통 푸르름의 바다. 그렇게 클 수 없는 둥근 연꽃잎이 10만평 회산백련지를 뒤덮고 있다. 그대로 걸어가도 물에 빠지지 않을 것 같다. 동양 최대의 백련 자생지. 충남 이남 지방의 가시연꽃 자생지로도 유일한 곳이지만 흔한 홍련이 아닌 백련군락이란 점에서 으뜸이다. 일제시대 주민이 백련 12주를 구해다 심은게 이처럼 번성했단다. 회산(回山)이란 마을 이름대로 세상의 기운을 모아 세상을 정화하려는 듯 어른 주먹보다 크게 만개한 백련이 곳곳에 뿌려져 있다.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가는 곳에 제일 많이 피어 있다. 아침나절 다투어 펴 정기를 받아들인다는 연꽃무리. 연붉은 홍련도 대롱에 우뚝해 눈에 띈다. 꿀벌들이 연꽃 속을 부지런히 드나든다. 작은 키로는 끝을 볼 수 없는 연잎바다. 어느새 새파래진 하늘과 맞물려 어디가 하늘의 시작인지 모르겠다. 피고지고를 반복해 한꺼번에 핀 백련의 장관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중간부분에 놓인 나무다리(백련교)를 건넌다. 어른 걸음으로 3백보 길이의 연꽃 관람용 다리다. 중간중간 사각형 관망대가 있다. 빙 둘러진 방죽길 산책도 빼놓을수 없다. 여인들이 받쳐든 알록달록 양산이 연잎의 초록과 어울려 정겹다. 주차장쪽 방죽을 따라 조성해 놓은 수생식물 자연학습장이 깔끔하다. 백련, 홍련, 가시연, 순채, 노랑어리연, 부레옥잠 등 26종의 수생식물이 따로 보호.전시돼 있다. 대부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것들인데 피어난 꽃이 그렇게 맑고 예쁠수 없다. 아주 큰 렌즈를 든 사진작가들이 이곳에 몰리는 이유다. 해는 높아지고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여기저기 감탄사가 터진다. 주차장쪽에는 연꽃축제 준비로 한창이다. 천박하게 떠들썩대지 않는, 조용한 정화의 여운을 남기는 그런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무안=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