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내외 금융시장에서 '오럴 해저드(oral hazard)'라는 신조어가 자주 들린다.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과 폴 오닐 재무부 장관의 잇단 말실수,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지나친 우경화 의사표명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의 경우 장재식 산업자원부 장관의 적정환율 발언이 외환시장에 커다란 충격을 미쳤고 진념 경제부총리의 성급한 발언이 금융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오럴 해저드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용어에 '입'을 뜻하는 오럴을 대입해 만들어졌다.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나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정책당국자의 설익고 무분별한 발언이 금융시장을 불안케 하는 현상을 비꼬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오럴 해저드는 정책당국자가 경제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전문성이 떨어질 때 발생한다. 특히 특정 목적을 의식해 국민인기에 부합하려는 경우 자주 목격된다. 시기적으로 세계 각국 여당의 집권후반기나 정책당국자의 교체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런 각도에서 보면 쉽게 이해된다. 문제는 오럴 해저드가 발생하면 가장 크게 우려되는 부작용은 정책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처럼 경기침체로 정책당국자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오럴 해저드가 발생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국민경제 전체를 어렵게 한다. 현 시점에서 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 커다란 정책비용(policy cost)을 부담해야 한다. 무엇보다 경기측면에서는 정책당국의 의도(signal)대로 정책수용층들이 반응(response)하지 않음에 따라 경기침체에 물가가 급등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나거나 경기침체와 물가급락이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데이션의 깊은 나락으로 빠진다. 정책당국도 재정수지는 악화되는데 금리를 더 이상 내리지 못하는 '무력화(ineffectiveness)' 단계에 처하게 된다. 물론 오럴 해저드의 우를 자주 범하는 정책당국자는 새 인물로 교체되면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정책당국자의 오럴 해저드로 정책의 신뢰성에 한번 금이 가기 시작하면 이것을 회복하기까지는 실로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1940년대 초 전비(戰費)조달과 관련된 독립성 논의과정에서 실추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신뢰성이 회복되기까지 약 5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유럽도 20세기 초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시기에 떨어진 정책신뢰도를 복구하기까지 7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최근 장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 금융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중남미를 비롯한 개도국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정책당국과 당국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크게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정책의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책당국자의 오럴 해저드를 해소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전 FRB 부의장 앨런 브라인더(현 프린스턴대 교수)가 98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조사의 대상은 통화정책 최고책임자인 84명의 세계 각국 중앙은행 총재와 53명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었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학자들은 정책(통화정책)의 신뢰성을 유지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①정책당국자의 오럴 해저드 해소 ②중앙은행 독립성 확보 ③인플레이션 투쟁역사 ④정책운용의 투명성 ⑤재정건전성 유지 ⑥사전준칙(rule)에 의한 의사결정 등의 항목에서 정책당국자의 오럴 해저드 해소를 가장 먼저 꼽았다. 결국 브라인더 교수는 정책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었다. "경제이론과 달리 실제로 정책에 대한 신뢰라는 것은 보상제도나 엄격한 사전약속(예:대통령의 장관직 유지)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는 전통(history of matching deeds to words)에 의해 정책당국자의 오럴 해저드를 해소하는 고통스러운(painstakingly)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신중하게 발언하고 일관되게 행동하는 정책당국과 정책당국자는 제도나 조직(정권교체)이 어떻게 되든 간에 국민들로부터 진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현 시점에서 진 부총리를 포함한 우리 정책당국자들이 브라인더 교수가 내린 결론을 곰곰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전문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