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교수 > 월남의 높은 사람이 서울에 왔던 지난 8월 어느 날-.어떤 인터넷신문의 토론란에 이런 제목의 글이 보였다. '파월 용사 된거 부끄러워 하시오!' '철없는 젊은이려니'하다가,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젊은이'란 짐작은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이 많은 사람도 철없기는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사실이 지난번 평양사태에서 나타났고,또 그것이 아니라도 '철없는 늙은이'가 우리나라에는 많으니까. 여하튼 그 사람은 '월남전이 미국의 부당한 식민지 전쟁이며,거기 용병이 돼 참전했던 한국 장병은 수치스러운 싸움에 말려들었으니,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논리인 듯하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개인적으로 나는 월남전을 다음 몇가지로 기억하고 있다. 우선 내가 먹고 사는 방편인 공부면에서도 월남전 참전은 중요하다. 내 전공은 과학사,특히 한국과학사인데 월남전이 여기서 한몫하고 있다.한국의 현대 과학기술사에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데,이 기관의 창설이 바로 월남전 덕분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1965년 5월 한·미 정상회담은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연구소 설립에 합의했고, 이에 따라 66년 2월10일 KIST가 설립됐다. 그후 이 연구기관은 통합과 분리 등의 풍파가 적지 않았지만,지금도 한국과학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요한 한국 과학기술 연구기관이 월남 파병에 대한 미국의 원조물자인 셈이다. 다음으로 내가 떠올리는 월남전쟁은 개인적인 사실이다. '월남'하면 친구의 참전과 귀환,그리고 다른 친구 동생의 전사를 떠올린다. 그 두사람은 모두 육사를 나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친구는 살아 돌아왔지만,다른 친구의 동생은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내 친구는 한 순간도 월남전 참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내 친구 동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옆에서 지켜 보던 나 역시 당시의 한국군이 월남에 가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 의식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가라면 가는 것이지-' 그저 이런 생각 밖에 갖지 못한 채 그 두 젊은이들은 월남에 갔고,하나는 거기서 죽었다. 월남전에서 죽은 한국군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차마 자료를 찾기가 두렵다. 그 많은 내 또래 한국인들이 '나라의 명을 받고' 종로 거리를 꽃에 쌓여 행진한 다음,그 땅에 건너갔던 것이다. 그들에게 지금 와서 '부끄러워 하라'니 왜 무엇을 부끄러워 하라는 말인가? 백발자국을 양보해서 월남전이 수치스러운 전쟁이라고 하자.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없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영우 교수의 '우리 역사'에 써 있듯이,월남전은 '젊은이의 피를 파는 행위'라는 비판이 당시에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책이 평가한 것처럼,월남 파병은 그후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 베트남 진출은 중동으로 이어져 한국경제의 큰 힘이 됐고,그것이 60∼70년대에 걸쳐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물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어떻게든 경제를 일으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애썼다. 게다가 진퇴양난에 빠진 미국으로서는 그 전쟁을 자유진영의 공동 전선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정치적 야심들이 모두 한몫 해서 내 또래 젊은이들이 월남전에서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그의 약점 때문에 월남 파병을 하게 됐다는 측면만 말할 수도 없다. 정통성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었던 이승만은 1954년에 이미 당시 거기서 싸우던 프랑스를 돕겠다고 월남 파병을 자원한 일도 있다. 실제로 세계가 좁아지면서 국제문제가 살벌해진 19세기 이후 국제분쟁이 끊임없지만,개인 사이의 도덕적 기준이 국제 관계에 반영될 수는 없다.신학자 니버의 책 제목처럼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의 갈등이 보여주는 현상이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고,또 그래야 마땅하다. 하지만 개인이 모여 만드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도덕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은 과거의 전쟁참여에 대해 사과하는 법이 아니다. 하물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애국심에서' 월남에 갔다가 산화한 우리 또래에게 '월남 파병 부끄러워 하라!'니,그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