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지루한 천국이요,한국은 신나는 지옥이다" 유럽 특파원 시절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한 고참 외교관이 던진 말이다. 복잡한 거리,치열한 경쟁 등을 생각하면 서울은 분명 지옥이지만 변화가 없는 유럽보다는 좋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사실 한국은 유럽에 비하면 짜증나는 사회다. 곳곳에 규제가 득실거리며 사람과 기업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다. 산에 오르면 처음 마주치는 게 '담배 피우지 마세요'란 벌금경고 입간판이다.또 차를 타면 안전벨트를 매야 하고,음주단속에 따른 교통체증도 감수해야 한다. 공장을 짓기 위해 관공서를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과도기'가 아닌 때가 없을 정도로 삶의 역동감을 절감할 수 있는 곳도 바로 한국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개혁'이란 단어는 단골처럼 등장한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영향으로 '법치'가 힘을 발하고 있지만,그 뒤안에는 온정이란 '보이지 않는 손'도 깊숙이 작용해 그만큼 '여지'도 크다. '신나는'이란 표현도 그래서 나왔는지 모른다. 특히 우리 정치판은 그 전형이다. 날마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지고,여야간의 순발력 있는 공방은 술자리 안주감을 제공한다. 대통령병이 만연해 적과 아군의 경계도 순간순간 바뀌고 있다.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가 색깔논쟁으로까지 발전한 게 단적인 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정치문제로 비화되자 야당은 언론압살을 주장했고,즉시 여당은 곡학아세(曲學阿世) 논쟁을 일으켰다. 이문열씨 등 사회 저명인사를 끌어들여 욕설까지 섞어가며 판을 키운 것이다.이에 야당이 한때 중남미에서 유행했던 포퓰리즘이란 용어까지 동원,사회주의 논쟁을 제기하자 여당은 친일논쟁이란 재료로 반격에 나섰다. 이같은 역동적인 상황에서 자칫 한눈을 팔다가는 술자리에서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문제는 신나하는 쪽은 기득권층,특히 권력층뿐이란 점이다. 국민 대다수는 이 때문에 오히려 극심한 허탈감과 피곤증을 느끼며 그야말로 생지옥에 살고 있다. 지난 주 이한동 총리가 보여준 총리직 잔류결정 과정이 그것이다. 모든 각료와 집권당 지도부,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일제히 사표를 제출한 그때 이 총리는 국정마비도 개의치 않은채 50여시간 동안 DJP간 줄다리기를 지켜봤다. 이전의 여느 지도자들처럼 고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향도 다녀왔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국민들의 시선을 신나게 만끽한 후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과 공직자의 도리'란 거창한 명분을 앞세워 JP를 떠났다. 그리고 국민들은 허탈감 속에 그가 남긴 안주거리를 소화해야 했다. 지금은 당정쇄신이란 요란한 구호 뒤에서 여권 핵심들이 자기들 만의 신나는 잔치를 벌이고 있다. 당내의 불만에도 개의치 않고 당과 청와대의 요직을 나눠 갖느라 여념이 없는 인상이 짙다. 청와대의 한 수석비서관이 비서실장 자리를 고사하고 이를 외부인사에 양보했다고 하니 '심했다'는 생각은 드는 모양이다. '이민이나 가야지'하는 말들이 입버릇처럼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현 정권 들어 정치개혁은 모든 개혁작업의 중심에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고 누누이 지적했고,국회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란 거창한 이름의 기구도 설치했다. 그러나 우리 권력층은 "무미건조한 정치인들이 모여 사는 천국보다는 현실(속된) 정치인들이 있는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한 중세기 유럽의 철학자 마키아벨리의 신도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비용 저효율적인 정치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정치시장도 외국에 개방해야 할 것 같은 씁쓰레한 생각마저 든다. 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