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막판까지 골머리를 앓아야 했던 해외채권단과의 협상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해외채권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은 교묘한 전략과 노골적인 협박으로 약자를 몰아 궁지로 끌고가는 국제 고리대금업자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98년초 외채협상때 한국 정부를 상대로 연체이자까지 받아낸 사람들이 바로 해외채권단이었다. 급할 때는 해결사를 동원하는 것도 사채업자와 다를 것이 없다. 국제사회에서의 해결사란 곧 힘 있는 정부를 말한다. 대우그룹의 해외채무 협상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외양으로 시작됐다. ● 협상은 돌고돈다 99년 8월초 일고여덟명의 외국인들이 까만 서류가방을 하나씩 들고 금감원의 오갑수 부원장보(국제담당)를 찾아왔다. 그들은 대우에 99억4천만달러(약 12조원)를 물린 2백여 해외 채권은행의 대표였다. "한국 정부가 원리금 지급을 보증해 달라. 지급보증에는 물론 연체이자와 회수지연에 따른 부대비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대우는 디폴트(부도) 처리하겠다" 까만 양복들의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최대한 받아낼 수 있다는 계산도 들어있었다. 그런 면에서 98년초 외채협상의 재판이기도 했다. "무슨 소리야. 당신들도 책임을 져야지.당신들도 대마불사를 믿고 돈을 빌려준 것 아니냐. 해외 채권단도 로스셰어링(손실분담)과 헤어컷(채무조정)을 해야지. 어떻게 거저 먹나" 오 부원장보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는 미국 대학에서 금융을 가르쳤고 월가의 생리도 비교적 잘 아는 편이었다. 며칠째 리허설을 거듭하면서 다짐했던 준비된 말들이 튀어나왔다. 해외채권단과의 6개월에 걸친 줄다리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 마크 워커와 라자드 8월18일 힐튼호텔에서 대우그룹 해외채무 협상이 시작됐다. 대우가 주관한 소위 '외채 만기연장 요청 설명회'엔 70여개 해외은행에서 1백60여명이 참석했다. 정말이지 국제 빚쟁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정부의 입장과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오 부원장보와 변양호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도 참석했다. 변양호 국장은 98년 외채협상에서 한차례 혹독한 시련을 겪은 다음이었다. 해외채권단 측에서는 체이스맨해튼, HSBC, 도쿄미쓰비시, 씨티, UBS, ABN암로, 다이이치간교, 아랍, 호주국립은행 등 채권액이 많은 9개은행의 임원급 대표로 운영위가 구성됐다. 이들은 힐튼에 캠프를 차렸다. 이들 9개은행의 대우 채권은 21억9천만달러로 전체 해외채무의 30%를 웃돌았다. 당장 급한 일은 노련한 변호사를 구하는 일이었다. 이상훈 (주)대우 전무, 황건호 구조조정본부 부사장 등 대우 금융라인이 국제변호사를 선임했다. 로펌인 '클리어리 고틀립'이 법률자문기관으로 선정돼 마크 워커, 제임스 밀스타인 등이 고문변호사로 참여했다. 워커 변호사는 98년 정부 외채협상에서 우리측 입장에 섰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금융자문기관은 국내에선 생소한 라자드가 맡게 됐다. BOA(뱅크오브아메리카)와 라자드가 후보로 올랐으나 대우측 이상훈 전무가 라자드를 주장했다. 라자드는 대우자동차 매각협상에서도 모건스탠리를 제치고 자문사로 선정됐다. 라자드를 선정한 것은 의외였다. 당국은 '반대'였으나 다른 대안도 없었다. 사건이 터지고 변호사들이 나서고 자문회사가 정해지는 일련의 과정은 적지않은 떡고물이 보장되는 이권이기도 했다. ● 오호근씨를 교체해 달라 해외채권단은 체이스맨해튼 HSBC 도쿄미쓰비시 등 3개 은행을 공동의장으로 내세우며 발빠르게 우리측을 압박해 왔다. 해외 채권단은 변호인에 김&장과 셔먼&스털링, 금융부문 자문기관으로는 언스트&영을 선정해 대응해 왔다. 원래 해외채권단의 상대는 국내채권단이었다. 어차피 대우는 변제능력이 없으니 국내은행들이 대신 갚든지 아니면 대우가 제공한 10조원의 담보를 해외채권단에도 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국내채권단은 결국 정부에 SOS를 쳤고 정부는 오호근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을 협상책임자로 지목했다. 오호근씨 역시 미국서 금융을 강의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는 터프하게 나갔다. "대우를 부도 내려면 내라.대우가 부도나면 제일 먼저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 아니냐"며 오호근씨도 배수진을 쳤다. 어느날 해외채권단 대표들이 금감위원장실로 들이닥쳤다. 이헌재의 장점은 바로 이때 발휘됐다. 그는 "미스터 오는 국제협상을 잘 모른다. 또 지나치게 터프하다. 그러니 적임자로 바꿔 달라"는 해외채권단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협상은 계속될 수 있었다. ● 두가지 선택 10월13일부터 보름간 양자협상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뉴욕이었다. 해외채권단은 한국 정부의 지급보증 등을 계속 요구해 왔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됐다. 그들은 줄기차게 한국 정부를 협상에 끌어들肩?했다. 협상 막판에 해외채권단은 오갑수 부원장보의 참석을 요구했다. 오호근씨나 마크 워커 등 '기술자'보다는 한국 정부가 만만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 무렵 대우 계열사에 대한 실사결과가 확정됐다. 대우 본사의 채권 회수율은 (주)대우의 최저 18%에서 최고 65%(대우중공업)에 불과했다. 해외 현지법인은 30∼90%였다. 회수율이란 당장 대우가 빚잔치에 들어갔을 때 원금을 건질 수 있는 비율. 오호근 위원장은 당황한 해외채권단에 두가지 선택을 제안했다. 국내 채권단과 함께 워크아웃에 참여하든지, 채권을 시가대로 팔고 손을 떼든지-. 워크아웃이냐 바이아웃이냐의 선택이기도 했다. ● 마지막 협상 해외채권단은 처음부터 워크아웃에 들어올 마음이 없었다. 원리금만 회수하면 그뿐이었다. 체이스맨해튼의 경우 대우그룹 여신 4억7천3백만달러중 (주)대우 여신이 93%인 4억4천만달러에 달해 거의 전부를 떼일 판이었다. 몸이 단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채권회수 요구수준을 85%로 낮췄다가 실사가 끝난 12월엔 59%로 수정 제시했다. 오호근씨와 마크 워커는 그 해 말 평균 회수율을 36.5%로 제안했다. 더 이상 양보는 없다는 통첩과 함께. 해를 넘겨 2000년 1월13일 해외채권단은 금감위원장에게 회수율을 45%로 또 낮추는 서한을 발송했다. 양측의 제시안이 10% 이내로 좁혀졌다. 1월20일 홍콩 오리엔탈만다린호텔에서 최종 라운드가 열렸다. 서울 도쿄 뉴욕을 돌아 홍콩까지 왔다. 협상이 끝나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흘간의 줄다리기 끝에 22일 새벽 양측은 평균 39∼40%의 회수율로 해외채권 일괄 매입에 합의했다. 대우 해외채권 협상은 그렇게 끝났다. 당국자들은 "우리나라가 해외 빚을 떼먹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서근우 금감위 심의관)고 말하지만 평가를 내리기는 아직은 시기상조다. [ 특별취재팀 =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