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그 회사는 흔히 수명이 다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 회사를 기억속에서 지워버리고 법정관리인은 패배가 확정된 경기를 끝막음하기 위한 패전처리 투수 정도로 치부된다. 하지만 법정관리는 결코 '기업의 무덤'이 아니다. 올들어서만 삼미특수강 이화요업 등 9개 기업이 부채를 다 갚거나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법정관리에서 졸업했다. 지금도 많은 법정관리기업들이 성실히 빚을 갚아가면서 정상화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기업이 부활하는 데는 구성원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가장 큰 힘이 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법정관리인"이라는 조타수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법정관리인들은 승산이 있어 보이는 경기를 최종 승리로 이끄는 마무리 투수와도 흡사하다. 10일 현재 서울지법 파산부가 관리하고 있는 64개 법정관리기업의 관리인들 중 한국경제신문이 각계 의견을 수렴,선정한 '기업회생의 전문가'들을 주1회씩 소개한다. --------------------------------------------------------------- '영업이익 2억원→3백26억원.경상이익 15억원→5백27억원.매출액 1천6백84억원→2천57억원'. 조이너스 꼼빠니아 등의 브랜드로 잘 알려진 의류 전문업체 나산이 법정관리 첫해(99년)와 이듬해 기록한 경영성과 비교표다. 올해도 상반기에만 1천42억원의 매출과 1백58억원의 경상이익을 냈다. 한마디로 '나산호'는 지금 '순항중'이다. 일각에서는 법정관리기업이라 상대적으로 낮은 이자 비용 덕을 본 때문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산은 이런 사람들에게 영업이익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이자비용을 반영하지 않은 영업이익이 지난 99년 2억원에서 1년만에 무려 1백63배나 좋아진 사실을. 나산이 이처럼 회생의 길로 들어선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전 1천2백50명에 달했던 직원수가 지금은 3백70명으로 70%정도 줄어들었을 만큼 직원들의 희생이 컸다는 점을 우선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산호'를 이끌고 있는 백영배(56) 법정관리인 겸 사장의 경영능력이 가장 큰 밑바탕이 됐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연세대 상대를 졸업하던 지난 67년 효성의 공채 1기로 입사,32년간을 근무해온 전문경영인이었다. 99년 효성물산 부회장 재직 당시 서울지법 파산부가 나산의 관리인을 한번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그는 이 제의를 놓고 1주일간 많은 번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법정관리기업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면 사회에 대한 보답일 수 있다고 생각해 과감히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해 6월 관리인을 맡은 후 그는 나산을 근본부터 바꿔 나갔다. 우선 '수익성 제일주의'를 천명,줄일 수 있는건 다 줄였다. 인기없는 브랜드는 물론 수익성없는 판매망을 철수시켰고 본사의 관리조직도 슬림화했다. 닥치는 대로 생산부터 해 놓고 남는 재고는 속칭 '땡처리'로 처분하던 관행도 "재고는 죄악"이라며 없애버렸다. 원·부재료를 5∼6단계에 달하는 중간 거래상으로부터 구입해 오던 과거 패턴을 해외 메이커로부터 직접 조달하는 쪽으로 바꿔 원가도 낮췄다. 이는 '좋은 옷을 합리적 가격에 제공한다'는 영업전략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그렇다고 무작정 감량경영만 추진한 건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에 대해서는 과감히 급여를 올려줬다. 현재 직원들의 봉급은 취임 당시와 비교해 30% 가량 인상됐다. 어려운 기업일수록 직원들의 사기를 올려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수한 사람마저 떠나면 법정관리 기업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법정관리기업의 회생 여부는 어떤 관리인이 선임되느냐에 따라 판가름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모든게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법정관리기업들이 우수한 관리인들을 영입하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안타깝다. 백 사장은 나산이 이제 안정궤도에 들어선 만큼 앞으로는 새 주인을 찾아주는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현재 3∼4개 투자펀드와 해외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어 1∼2년 이내에는 나산이 새 대주주를 찾고 법정관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그는 그런 뒤 조용히 은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