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아침 6시. 현대증권 뉴욕법인의 주익수 법인장은 이날따라 유난히도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뉴저지주 버겐카운티의 테너플라이에 있는 집을 나섰다. 뉴욕 맨해튼 남단의 월드트레이드센터(WTC)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하기 위해서였다. 1백10층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쌍둥이 빌딩 중 남쪽 건물인 빌딩넘버원 78층에 현대증권 뉴욕법인은 자리잡고 있었다. 같은 건물의 84층에는 LG증권과 LG화재 뉴욕법인이, 21층에는 동원증권 뉴욕법인이 각각 들어있었다. 월드트레이드센터는 월가의 중심인 뉴욕증권거래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만큼 증권사들로서는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등 내로라 하는 주요 증권사의 본사가 대거 입주,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부로 불렸다. 7시쯤 이 '심장부'의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사무실로 올라가 맨해튼 시내를 내려다보며 근무를 시작했다. 서울 본사와 연락을 취한 뒤 오전 9시에 개장되는 증시 일정에 맞춰 일과를 챙기던 8시 50분쯤. 엄청난 소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경보사이렌이 울리며 주변은 즉각 뿌연 연기에 휩싸였다. 수만명이 근무하는 빌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긴급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비명처럼 이어졌다. 그는 중요 서류들만을 간단히 챙기고는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완전히 불통 상태.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비상계단쪽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그도 직원들과 함께 비상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둡고 아수라장 같은 비상계단을 통해 78층을 걸어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간 중간 비상계단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뛰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소름이 끼쳤다. 오직 빨리 이 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없이 한시간쯤 내려갔을까. 밖이 환했다. 1층이었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려 할때 갑자기 건물벽이 무너졌다. 다시 안에 갇혔다. 마침 소방대원들이 무너진 벽을 걷어내고 들어와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줬다. 간신히 건물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안간힘을 쓰면서 내려온 빌딩을 돌아 보았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건물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정말 잠깐 사이였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과도 같았다. 정신없이 뛰어서 안전지대로 빠져 나온 그는 일단 동료직원들의 생사부터 확인했다. 휴대폰으로 서로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집에 전화를 했다. 남편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부인은 반가움에 울음부터 터뜨렸다. 주위는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던 건물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제모습이 아니었다. 소방대원들과 경찰들도 여기저기 피흘리며 누워 있었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계속해서 고막을 울렸다. 맨해튼 남쪽의 교통은 완전히 통제돼 있었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현장'을 뒤로 하고 무작정 걸었다. 친구가 근무하는 52가의 대우증권 뉴욕법인으로 발길을 옮겼다. 차로 10분이면 되는 거리지만 탈진한 그에게는 꼬박 3시간 걸렸다. 하루종일 안부가 궁금해 그의 행방을 찾던 기자에게 그가 처음 꺼낸 말은 "살아 돌아왔습니다"였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