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남북 장관급회담(9.15∼18, 서울) 개최로소강상태에 있던 남북 당국간 회담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13일 담화를 통해 장관급회담에 적극 임할 것임을 밝혀, 회담의 전망을 더욱 밝게 해 주고 있다. 장관급회담을 계기로 과거 열렸던 주요 남북 당국자 회담을 살펴본다. 남북 당국자가 대좌한 주요 회담으로는 △조절위원회 회의 △총리회담 실무접촉△경제회담 △국회회담 예비 및 준비접촉 △고위급회담 △특사교환 실무대표접촉 △정상회담 준비접촉 △베이징회담 △당국대표회담 △차관급회담 △정상회담 △장관급회담 △국방장관회담 등이 있다. 남북한은 지난 72년 10월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에서 마주 앉은이후 본격적으로 회담을 갖게 됐다. 조절위원회 회의는 남북한이 밀사를 교환,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ㆍ운영키로 합의함에 따라 열리게 됐다. 남북한은 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를 3차례 가진 이후 지난 75년 3월까지 본회의 3차례, 간사회의 3차례, 부위원장 회의 10차례를 진행했다. 이들 회담은 군축,무기반입 중지 등 제안에 대해 공방이 거듭되다가 소득없이 끝났다. 남북한은 지난 80년대 접어들면서 차관급을 수석대표로 한 `남북 총리회담 실무접촉'을 10차례(1980.2∼8)나 가졌으나 서로의 이견만 확인한채 총리회담은 열지도못했다. 북측의 남북 총리회담 제의에 남한이 호응함으로써 이뤄진 실무접촉에서는교류협력 등 의제, 개최일시 등 총리회담의 일정이 논의됐다. 지난 83년 일어난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폭파테러사건 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진남북 당국간 회담은 이듬해인 84년 북한의 수해 지원으로 관계가 호전되면서 경제회담으로 이어졌다. 남북한은 지난 84년 11월부터 5차례 열린 경제회담에서 물자교역과 경제협력을 집중 논의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지난 80년대 중ㆍ후반에는 경제회담에 이어 국회회담 예비 및 준비접촉도 열렸다. 지난 85년 7월 `불가침 공동선언' 채택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국회회담 예비접촉은 북한이 지난 86년 한ㆍ미 팀스피리트 합동훈련을 이유로 유산시킬 때까지 3차례열렸다. 지난 88년 8월 열린 국회회담 준비접촉은 지난 90년 1월까지 수석대표 단독접촉을 포함해 11차례 열렸다. 준비접촉에서는 인적ㆍ물적 교류, 제24차 올림픽 참가 등의 문제가 논의됐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등 정치적 문제까지 불거져 결국 공전됐다. 국회회담 준비접촉과 비슷한 시기 남북 고위급회담 예비회담(1989.2∼1990.7)도열렸으며 여기서 합의된 의제와 일정에 따라 지난 90년 9월부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8차례에 걸쳐 본회담이 진행됐다. 고위급회담 본회담에서는 상호 신뢰구축과 긴장완화 문제 등이 포괄적으로 협의됐으며 특히 지난 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제5차회담에서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합의서)가 마련됐다. 남북합의서를 채택했음에도 북한이 지난 92년 말 팀스피리트훈련을 이유로 대화중단을 선언, 고착상태에 빠진 남북 당국대화는 지난 93년 5월 남북 최고위급의 뜻을 전달할 특사교환 실무접촉으로 재개됐다. 수석대표 단독접촉을 포함 5차례의 실무접촉이 이뤄졌으나 쌍방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남북합의서를 채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교착과 재개를 거듭하던 남북대화는 지난 94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듯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에 정상회담이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중재로 합의된 것이다. 그러나 지난 94년 7월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물거품이 됐다. 남북한은 정상회담을 위해 부총리급 예비접촉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했으며 정상회담 실무절차 협의를 위한 실무대표접촉, 통신 및 경호 실무접촉 등을 가졌다. 김 주석 사후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했고 이로 인해 차관급을 단장으로한 남북한의 대표단이 지난 95년 베이징에서 마주 앉았다. 남한은 베이징회담에서북측에 15만t을 제공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쌀 제공 과정에서 운반선인 `씨아펙스'호 인공기게양사건, `우성'호와 `삼선 비너스'호 선원 억류사건 등이 발생해 이를논의하기 위한 회담도 가져야 했다. 남북한은 지난 98년 4월에도 베이징에서 비료 제공문제 만났으나 합의를 보지못했고 다음해 4월 열린 차관급회담에서 북측에 비료 20만t을 제공키로 합의했다. 남북한은 지난해 6월을 기점으로 남북관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94년 성사되지 못한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평양을 방문,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와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6ㆍ15남북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남북 장관급회담과 국방장관회담등 남북 당국회담이 잇따라 열리게 됐다. 남북弱奐史릿是?지난해 7∼12월 4차례가 열렸다. 남북한은 4차례의 장관급회담을 통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동포 고향방문, 경의선 철도의 끊어진 구간(문산-개성간 24㎞) 연결, 투자 보장ㆍ이중과세 방지 등 경협의 제도적 장치 마련, 임진강수해방지 사업 공동추진, 한라산-백두산 관광단 교환, 이산가족 생사교환ㆍ서신교환ㆍ면회소 설치 등에 관한 조속한 조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설치 등에 합의했다. 지난해 9월 열린 국방장관회담에서도 군사적 긴장 완화, 한반도 항구적 평화 등에 공동으로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 이와 함께 2차례의 남북경제협력실무접촉,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1차회의 등도 열렸다. 이외에도 남북한과 미국과 중국이 참가한 4자회담 본회담도 지난 97년 12월부터99년 8월까지 6차례 열렸다. (서울=연합뉴스) 정연식기자 jys@yonhap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