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세계적인 달러 약세의 흐름속에서도 17일 원화는 도도하게 사흘 내리 약세다. 미국의 보복이 코앞에 닥쳐왔음을 감지한 채 시장 불안감은 '달러를 사거나 보유하자'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일본 엔화는 관심권 밖으로 밀리고 있으며 오히려 국내 주가나 경제 상황의 악화에 더듬이를 세우고 있는 형편. 주변국 통화로서의 위치를 각인시키는 듯, 유독 국내에서는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현재 달러 매도세력이 실종된 상황에서 추가적인 원화 약세를 예상케하고 있다. 신흥시장 통화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원화로서는 달러화가 약세로 가더라도 엔화나 유로화와는 다른 흐름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세계시장에서는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유로나 엔화 등의 다른 기축통화가 있으나 국내에서는 이들 통화로 대체하기 어렵다는 상황이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아시아통화는 대체로 강세를 보이고 있어 원화만 '왕따'를 당하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딜러는 "전쟁이 발발해도 유로나 엔화 등의 통화로 바꾸기 어렵다"며 "또 달러 약세를 이어가면서도 일본 정부에서 개입이 나와 달러/엔은 지지가 될 것이란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17일 오후들어 환율은 장중 1,30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지난달 1일 장중 1,301원을 기록한 이후 처음이다. 이와 함께 뉴욕 증시가 재개된 이후에 달러화가 급락할 경우 미국 부시행정부의 조치가 추가로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급격한 달러 약세를 국가 안보 이슈로 받아들일 것이란 전망. 정상적인 국내에서 시장논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는 현 상황은 추가적으로 몇 가지 형태로 충격을 더해 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현재 시장에 반영되고 있는 전쟁 직전의 불안감 △전쟁에 따른 충격 △발발 이후의 불확실성 등이다. 가장 앞선 불안감의 경우 심리적인 달러 보유 심리에 불을 붙이고 있으며 국제 유가 급등에 대한 우려는 정유사 등을 중심으로 한 결제수요를 촉발시키고 있다. 수입수요 증가가 예상되는 측면. 기업들도 보유 달러를 팔지 말고 최대한 유보하고 있으라는 지시가 떨어진 상황이다. 환금성과 가치 보전이 가능한 달러를 가지고 있는 것이 기업의 유동성 확보에 이득이 되리란 전망. 미국의 소비심리 악화로 수출 감소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달러가 들어올 수 있는 경로보다는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더 크게 열려있는 셈. 아울러 국내 증시의 약세는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의 일시적 유출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래저래 원화에 대한 매력은 떨어지고 달러화에 매력을 느끼는 상황. 달러/엔 환율은 오전장 내내 내림세를 띠다가 일본은행(BOJ)이 결국 개입을 단행, 엔화 강세의 흐름을 돌려놓았다. 시오카와 일본 재무상은 이날 개입 후 "엔화가치의 급한 상승은 일본 경제 회복에 바람직하지 않아 외환시장에 개입하게 됐다"며 "필요하면 추가로 시장에 개입할 것"이라고 말해 달러/엔 환율의 하락을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달러/엔은 한때 116.90엔대까지 저점을 낮췄으나 이번 개입으로 118엔까지 다다르기도 하는 급등세를 거친 끝에 오후 2시 2분 현재 118.12엔을 기록중이다. 엔/원 환율은 같은 시각 100엔당 1,100원을 넘어서며 지난 1월 4일 1,128.53원을 기록한 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시장 참가자들 사이에는 과도하게 오른 것이 아니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으나 엔화 강세에는 무표정하고 엔 약세에 민감한 현 상황은 추가적인 엔/원의 상승을 가늠케하고 있다. 달러화가 선진국 중앙은행의 지지를 버팀목으로 둔다면 원화는 홀가분하게 약세를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지게 된다. 달러/엔 환율의 하락세가 달러/원의 상승을 가로막는 요인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제한요인이 누그러지는 셈. 우리 정부의 환율 인식이 중요한 시점이다. 현재로선 안정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유가가 심상찮은 상태에서 '물가 안정'이라는 큰 과제를 지닌 정부가 어떤 수준에서 환율을 가늠할 것인지, 수출 감소가 뻔한 상황에서 환율 운용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중요하다. 하지만 가격 경쟁력이 아무리 좋아도 미국의 소비심리가 위축된 현 상황에서 수출을 늘리는데 환율은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측면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 시장관계자는 "미국 테러사태 직후 불안심리를 고조시킨 정부의 발언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며 "투기조짐이 드러났을 때 구두개입을 통해 이를 방어하는 자세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경닷컴 이준수기자 jslyd01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