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秘史'] (19) '불발로 끝난 양심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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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를 일컬어 마법의 성(城)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복잡한 숫자들로 채워진 거대한 마법의 성...
이 숫자의 세계에서 어디까지가 자연수이며 어디부터가 허수인지를 탐색하는 것은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노련한 재판관 조차도 대우의 자금대차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해 지금껏 우와좌왕하고 있지 않은가.
적당한 선을 정해 숫자와의 타협을 시도하는 것은 사실 김우중 회장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는 오늘 시계를 돌려 지난 96년 8월로 거슬러 간다.
대우 몰락은 물론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시기.
일단의 젊은 공인회계사들이 서울 수송동 조계사 근처의 한 커피숍에서 며칠째 모임을 갖고 있다.
이들은 지금 조그만 반란을 도모하는 중이다.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를 폭로할 것인지가 이들의 주제였다.
조계사 옆 커피숍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외부감사를 나가봤자 회사측에서 제시하는 '숫자'를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다방 구석자리에서 동기생들을 기다리던 산동회계법인의 K회계사.
이런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기다리던 C회계사와 또 다른 K회계사가 들어왔다.
"K형 회사(회계법인)는 어떻게 됐어"
"다들 생각이 비슷해, 한번 해봐야지"
95년 공인회계사 동기생들인 이들은 이른바 '양심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송동 커피숍은 양심선언을 준비하기 위한 회합 장소.
이미 3차례나 모였고 회계법인별로 2~3명씩 모두 20여명이 '거사'에 참여키로 했다.
이들이 양심선언을 계획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들러리 회계감사'에 대한 회의와 좌절감이 컸다.
부실한 회계감사를 계속하는 한 언제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다.
대우 패망의 전조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감지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고뇌는 더욱 컸다.
심증과 물증
양심선언을 위해 모인 젊은 회계사들의 주축은 산동회계법인 소속 회계사들이었다.
대우 패망과 더불어 결국 문을 닫게 된 바로 그 산동회계법인이었다.
'양심선언을 위한 회계사 모임'의 대표는 자연스레 산동의 감사3팀에 속한 김정득 회계사가 뽑혔다.
당시 모임에 참여했던 K회계사는 양심선언의 직접적인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감사1팀에 있던 동료가 놀랄만한 이야기를 했었다. (주)대우가 매출액을 2조~3조원이나 부풀렸다는 심증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주)대우는 세계경영의 베이스캠프였기 때문에 우선 숫자의 구성부터가 복잡했다.
문제는 95회계연도 재무제표에서 발생했다.
회사측은 이런 저런 핑계로 일부 자료를 감사인에게 제출하지 않았다.
회계사로서는 감사 범위를 제한당했으니 '한정' 의견을 내야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감사인과 회사는 서로가 물고 물린 관계였다.
회계사로서는 일감이었고 회사로서는 수임료를 주는 관계였다.
감사의견은 결국 '적정'으로 나갔다.
양심선언 이야기가 나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속속 모여든 비밀문서
양심 선언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은 증거수집에서부터 시작됐다.
각자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분식회계 사례를 모아서 요약했다.
혼자 일하는 시간을 틈타 감사조서를 일일이 복사했다.
감사조서에는 어떤 식으로든 분식회계 사실이 남게 마련이었다.
이렇게 모은 증거가 수십건이었다.
양심선언문은 차곡차곡 '사실과 주장'을 담으며 정리돼 갔다.
다음은 당시 양심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던 한 회계사의 증언.
"양심선언문은 크게 두가지 내용을 담았습니다. 우선 대우를 비롯한 각 기업의 장부조작 사례를 폭로하는 부분이 있고 회계법인의 부실감사 눈감아주기 사례도 포함했습니다. (주)대우의 대표적인 분식 유형도 몇가지 적시됐어요"
선배들
공인회계사의 양심선언이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지난 89년 3월엔 '공정감사를 위한 공인회계사협회(이하 공공협)'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공공협은 증권감독원에 감사인 선임위원회를 한시적으로 두자며 목소리를 높였던 젊은 회계사들의 단체였다.
초대회장을 맡았던 안건회계법인의 이재술(44.현재 딜로이트투쉬기업금융 대표) 회계사는 "회계업계에 문제가 허다했다. 피감회사도 그렇지만 감사인들도 부실하긴 마찬가지였다. 개혁성향의 회계사 단체를 만들려 했다"며 공공협 창립배경을 설명했다.
이들이 공공협을 만들기로 하고 창립총회를 가졌을 때 참여한 회계사는 2백여명.
적지 않은 숫자였다.
공공협은 감사인 지정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공청회도 열고 야당 국회의원을 상대로 로비를 전개하는 등 노력을 쏟았다.
부채비율이 높거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기업에 대해 감사인을 지정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이 개정된 것은 이들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회계업계 내부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사회분위기가 바뀌면서 점차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휴지가 되고 만 양심선언문
한달여의 작업 끝에 대우분식을 폭로하는 양심선언문이 작성됐다.
그러나 정작 문안 작성이 끝나자 삼일 등 일부 대형회계법인의 회계사들부터 발을 빼기 시작했다.
"양심선언을 해서 우리에게 무슨 실익이 있느냐"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역시 전문직업인 집단이었다.
배수진을 운운하기에는 직업 그 자체가 주는 무게가 컸다.
어쩌면 대우의 김 회장이야말로 바로 그런 논리의 함정에 빠져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룹 전체가 진군 대형을 짜고 해외로 진출해 나가는데 일시적인 분식회계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말이다.
분식은 다음해에 더 벌어 메우면 되는 것일 뿐 다만 장부 정리를 위해 할 일을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김 회장의 머리를 채웠을 것이었다.
젊은 회계사들이었지만 의견은 점차 갈라져 나갔다.
양심선언문 작성을 준비했던 실무진조차 이탈자가 생겨났다.
"양심선언을 해 봤자 우리만 손해라는 생각도 들었다. 89년 공공협 선배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지만 그들 역시 대부분 불이익을 당하고 말았던 전례도 우리의 의지를 꺾었다"고 한 회계사는 당시를 회고했다.
대우가 문을 닫기 3년 전인 96년 8월, 한달여에 걸쳐 작성된 양심선언문은 이렇게 해서 휴지조각으로 변해갔다.
차라리 그때 양심선언이 터지고 대우의 장부가 천하에 드러났다면 대우는 3년후 '그룹 패망'으로까지 말려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특별취재팀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