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를 떠난 산에 부처님이 머문다는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수없이 찾아드는 관광객들이 붐비는 탓에 경내가 어수선하지만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총지선원(總持禪院)은 적묵(寂默)그대로다. 한참을 둘러봐도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이 곳에서 법주사 선덕(禪德) 천룡(天龍.66)스님을 만났다. 지난 63년 금오(1896~1968)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천룡 스님은 상원사 청량선원을 비롯해 제방선원을 답파하고 각종 경전,불서까지 섭렵했다.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체구와 형형한 눈빛이 고희를 바라보는 사람같지 않다. 총지선원 한 켠에 있는 스님의 방에 들어서니 좌우 벽면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불서(佛書)로 빼곡하다. 법문을 청하자 요즘 세계적 관심사인 미국 테러와 종교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못된 종교가 지금까지 쌓아온 공덕을 부숴버릴 겁니다. 전쟁도 무엇도 모두 거기서 비롯돼요. 사람을 언어와 사유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깨달음이 없다면 오히려 이런 것들이 환란을 부릅니다" 나와 너를 가르는 이분법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 것만이 최고라는 망집(妄執)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종교가 오히려 분쟁과 대립의 독소가 되고 만다는 설명이다. 각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조차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자기본위의 망집일뿐 이라고 했다. 그 깨달음의 실체가 뭐냐고 물었다. "우주는 연기적 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죠. 사람이나 동·식물이나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 현상은 인연에 따라 그때그때 모습을 드러낼뿐 모든 것은 상호관계 속에서 이뤄집니다. 내 몸만 해도 모든 사물이 뱉어낸 응체(凝體)인 공기를 먹고 살고 또 이 공기를 내뱉으면 우주의 일부가 되지요.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요,화엄경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사상이지요" 따라서 "내가 곧 우주"라고 천룡 스님은 강조한다. 돌 한덩이,나무 한 그루,새 한마리,한 그릇의 음식…. 그 어떤 것도 연기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너도,그 누구도 소우주가 아닐 수 없는 까닭이다. 인간이 자연을 멋대로 훼손해선 안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천지동근(天地同根)만물일체(萬物一體)라,자연은 인간의 모체입니다. 요즘 산사에도 자꾸 찻길을 내는데 옳지 않아요.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산에는 가급적 길을 내지 말고 짐승들이 다니는 길로 살금살금 표 안나게 다녀야 해요. 인간의 편의대로 마구 깎아서 산이 죽으면 결국 인간에게 과보(果報)로 오지요" 인간이 만든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도 천룡 스님은 "깨달음이 없다면 허망한 것"이라고 했다. 문명과 역사가 인간의 편의와 풍요,안락이라는 측면에서는 많이 발전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아진 게 없다는 말이다. "미국은 과학과 힘의 노예가 돼있고 테러를 주도했다는 오사마 빈 라덴은 잘못된 종교의 노예가 돼있어요. 힘의 논리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이나 이슬람 근본주의를 위해 남을 죽여야 한다는 라덴이나 모두 근본무지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천만(千萬)의 강이 모여 바다가 되듯 온갖 종교의 가르침도 깨달음으로 수용해야 진정한 절대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나 의식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持月)일뿐 이에 집착하면 오히려 신도 가르침도 죽인다는 얘기다. "아름다운 꽃은 한아름을 따도 일주일이 지나면 쓰레기가 되지만 볼품없는 씨앗은 주워다 심으면 생명이 되지요. 그런데도 지금은 생명같은 깨달음은 아랑곳 않고 물질주의만 남았어요. 돈이 친구요 부모요 하느님이고 부처님이죠. 검찰에 잡혀간 높은 사람들이 다 하느님 부처님 믿는다고 하지만 돈과 물질에 끌리면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다 팔아버리거든요" 천룡 스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사 등에서 일하다 28세 때 늦깎이로 출가했다. 그러나 금오 스님이 준 '무자(無字)'화두로 맹렬히 수행,일찍이 수좌계에 이름을 떨쳤다. 금산 태고사에서 수행할 땐 졸리면 한겨울에도 우물로 뛰어들었다. 만행을 할 땐 집에 들어가서 자지 않을 것,걸식할 것,차를 타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약속해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위법망구(爲法忘軀·깨달음을 위해 몸을 잊어버림)로 수행한 결과 반신불수가 돼 반년 동안 기동조차 못하기도 했다. "그런 독기가 없으면 정진할 수 없어요. 평상을 이기고 일상생활을 무섭게 극복해야지요. 물이 맑으면 밑바닥이 다 보이듯 깨달으면 인간사가 다 보이거든요. 그러나 깨달음은 백척간두(百尺竿頭)라,혼자 그곳에 머문다면 죽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進一步)해 다시 세상으로 내려와야지요" 여간해선 산문을 나서지 않지만 법문 요청은 거절하지 않는 까닭이다. 천룡 스님은 "수불세수 금불박금(水不洗水 金不博金·물은 물로 씻을 수 없고 금에는 금을 바를 수 없다)이니 자기를 깨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반성하고 남과 싸우지 않으려면 나의 그릇을 키우라"고 했다. 선원 밖으로 나서니 가을 하늘이 더욱 맑고 높아 보인다. 법주사=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