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추석때 고향 가시거든... .. 김병종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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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 서울대 미대 부학장 / 화가 >
세상 모든 풍조가 급변하고 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전국 방방곡곡에 보급되면서 통신수단뿐 아니라 인정 또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요새는 뉴욕이나 파리를 부산이나 광주 다녀오듯 드나드는 세상이 돼 웬만큼의 장거리 출장이 아니면 가장이 먼 길을 떠나도 가족들은 별 반응이 없다.
서울과 지방 간의 거리감도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생활 코드는 거의 모두 바뀌어 가고 있다.
우리가 미덕이라고 여겼던 가치관들도 속속 뒤집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다.
설과 추석에 대한 우리들의 정서다.
특히 추석은 고향을 떠나온 모든 사람에게 애틋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명절이다.
물론 요즘은 추석에 대한 정서마저도 신세대와 구세대간에 확연한 격차가 있긴 하지만,한국인에게 추석은 의미있고 각별한 명절이다.
도회지의 살림이 고달프면 고달플수록 한가위 추석 명절을 그리는 마음은 더욱 애틋해진다.
맨발로 뛰어나와 맞아주는 어머니가 계시는 곳,논농사 밭곡식으로 풍성한 식탁이 있는 곳이 우리가 그리는 추석이다.
'전쟁'으로 비견될 만큼 힘겨운 귀향 길을 마다 하지 않고 너나 없이 추석이면 고향행을 서두르는 것도 그것이 단순히 그리던 고향에 간다는 의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우리가 떠나온 원형적 한국인의 삶이 있다.
가족간의 소멸하지 않는 끈끈한 인정이 있고 사랑과 우애가 있다.
고향의 추석에는 묘한 치유의 힘이 있다.
도회지에 살면서 상처 입었던 마음들과 고달픈 마음들이 추석을 맞아 내려간 고향집에서 하루 이틀만 자고 나면 씻은 듯 가라앉게 된다.마치 아픈 배를 쓸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말이다.
흩어졌던 가족이 함께 모여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화기애애하게 식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한국인은 신명의 민족이다.
신명이 나면 웬만큼 어려운 일도 너끈히 해낼 수 있는 반면,신명을 잃어버리면 쉬운 일도 매우 힘겨워 하는 것이다.
추석 명절은 신명의 불길을 지피는 명절이다.
그래서 추석 명절은 단순히 흩어졌던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모여 음식이나 나누고 안부나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다.
제각기 삶의 모퉁이를 지나온 사람들이 그 원초적 공간에 모여 일시나마 짐을 내려놓고 다시 힘을 모으는 명절이다.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며 지금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명절이며,즐거웠던 시절들을 떠올려 오늘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는 명절이다.
간혹 외국인들이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그 기나긴 귀향 차량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하지만 그들은 추석에 숨은 의미를 알 리 없기에 그 고된 귀향 행렬 또한 알 턱이 없다.확실히 추석을 통해 우리는 잊고 살았던 우리의 근본을 떠올리게 된다.
나 역시 추석이 가까워 오면 늘 어린애처럼 마음이 설레곤 했었다.
늙으신 노모를 뵙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흡사 내가 자라지 않고 소년 그대로인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곤 했다.
특히 대화 중에 듣게 되는 노인의 지혜는 소중한 것들이 참 많았다.
옛날에는 어머니의 이야기란 모두 구닥다리고,따라서 현대의 삶 속에서는 거의 쓸모 없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곤 했다.
하지만 세상을 살수록 무심히 흘려들었던 그 분의 이야기가 참 지혜로운 것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곤 한다.
그러나 이제 마루에 앉아 둥글게 떠오른 달을 보며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던 그 즐거운 추억은 되풀이할 수가 없다.
몇년 전 소천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의 고향집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늘 그 분이 돌보시던 마당의 채마밭은 잡풀로 우거져 있고,빈 하늘로 가지를 뻗은 감나무 또한 휑하니 쓸쓸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고향의 추석이 그토록 그리운 명절로 떠올려졌던 것은 거기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니가 떠나 버린 고향의 추석은 텅 빈 추석이다.
형제들이 모처럼 모여들어도 식사 한 끼 하고는 휑하니 흩어져 버리기 일쑤다.
어머니라는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고향에 그대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계시다면 당신은 행복하다.
부디 올 추석도 그대의 노모와 마루에 앉아 넉넉하게 떠오른 달빛 속에 잠겨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다 오기를….
kimby@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