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자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규장각 관장 > 오늘은 단기 4334년의 개천절이니 우리나라의 건국기념일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경축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득한 옛날 단군 왕검이 과연 존재했겠느냐는 의문과, 우리의 건국기념일을 단군에 연관시킬 때 너무 과장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아마도 서구의 근대국가들이 대부분 과학의 시대에 확실한 역사적 기록을 갖고 태어났음에 비해 우리의 건국은 선사시대이기에 비과학적이라고 여기는 사고가 일각에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는 그리스나 로마신화는 과학성을 따지지 않고 신화로서 인정하면서도, 유독 우리의 단군신화에 대해서는 회의한다. 특히 '반만년 역사' 운운하는 과장법에 질린다고 하는 말도 흔히 듣게 된다. 일본처럼 역사를 조작하는 것도 아닌데 신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부담스러워 할 이유는 없다. 신화는 신화로서 의의가 있고, 또 그 신화의 해석을 통해 여러가지 사실들을 유추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소중한 지적 자산이다. 과학성을 따지기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건국신화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단군신화에는 고인돌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에 하느님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왕족과, 곰을 토템으로 숭상하는 왕비족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이 조선이라는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이 은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 시기는 인류 최고 문명발상지의 하나인 중국에서는 요순(堯舜)시대로 돼 있다. 단군신화에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열었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단군 조선의 건국이념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해 이 세상을 다스려 깨우친다는 도덕적 이념은 인류가 이상으로 삼을 만한 보편성이 있다. 휴머니즘의 고급한 표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 건국이념이 언제부터 고조선의 건국이념이 됐는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우리의 선조들이 이러한 건국이념을 가슴에 품어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선진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왔지만, 우리민족 정서의 저 깊은 내면에는 줄기차게 이러한 건국정신이 자리잡고 외래문화를 걸러내는 거름종이의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불교든 유교든 기독교든 외래종교가 우리나라에 오면 유난스럽게 인간의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저 세상보다는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이 강해 낙천적이고 여유가 있다. 다시 맞은 개천절의 이 아침에 우리 국가의 방향성에 대한 지침으로서 단군 왕검의 건국이념을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할 필요는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아울러 오늘날과 같은 난세에 우리의 갈 길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겠다. 미국이 독주하는 국제사회에서 아랍문명권이 반기를 들었다 하여 미국의 편에 서지 않으면 적성국으로 분류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생존전략을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지도 심사숙고해야 할 과제이다. 역사상 세계는 하나의 종교나 이념으로 독점된 적도 없고, 하나의 강대국이 전세계를 제국화한 적도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하겠다. 12세기에 원나라가 유럽과 아시아의 양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고려는 끝까지 버텨 원제국에의 편입을 모면하고 사위나라가 됐다. 원 황실을 외가로 한 고려왕들은 연경에 교거(僑居)하면서 원의 지성계와 황실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록 1945년 광복 이후에 우리가 국가의 방향성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지만, 이제는 망국과 6.25 전쟁으로 손상된 정체성을 찾아 방향성을 확립할 때가 됐다. 개인에게 있어서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듯이, 국가도 뜻이 분명해야 한다.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제목소리를 내려면 국가의 방향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 방향성을 국민에게 설득하고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