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지옥에 있다" 아르튀르 랭보(1854∼1891)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도 지금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지옥에 있다. 그런데 최근 번역 출간된 랭보의 전기 '지옥으로부터의 자유'의 책 선전문구가 '지옥 같은 세상,랭보를 읽는다'인 것을 보면 나 이외에도 지금 이곳을 지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모양이다. 왜 세상이 지옥같을까.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없는 경우와,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경우이다.이 세상이 아무리 천국이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없다면 지옥과 다름없다. 반대로 이 세상이 지옥이라면 사랑하는 사람만이라도 다른 세상에 있길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느끼는 '마음의 지옥'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지 못해서가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있어서라는 말이 된다. 지금 이 세상은 '적과의 동침'이 자연스러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되면 모두 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편가르기식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인해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까지 나온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 적과 동지의 기준조차도 변한다. 순정도 없고,의리도 없다. 오로지 나와 같은가,아니면 나와 다른가라는 기준 아닌 기준에 의해 '헤쳐 모여'를 반복할 뿐이다.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이나 '전짓불 앞의 방백'을 보면 이런 편가르기의 공포가 잘 드러난다.6·25전쟁 중 갑자기 정체모를 사람들이 나타나 전짓불을 들이대며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다. 그들이 경찰인지 공비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고,그 대답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이런 '전짓불의 공포'는 그 자체로 실존의 위기를 나타낸다. 심각한 문제는 지금의 우리들도 그때처럼 '당신은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권력을 가진 자인가 아니면 권력을 비판하는 자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나,그렇다고 판정받은 사람은 환영을 받거나 공격을 당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다른 그들'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는 없다. 더욱 기막힌 것은 같은 '그들'사이에서도 다시 '그들'과 '그들 속의 그들'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정치권을 보아도 이제 여권과 여권 사이의 공조는 깨졌다. 여권 속의 다른 여권 때문이고,남과 북 사이의 대립보다는 남과 남 사이의 갈등 때문이다. 나는 이런 지옥 같은 세상이 상황 자체에 기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도나 권력,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치유 불능의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이다.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국가나 사회도 없으므로 세상은 언제나 문제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기를 바라기보다,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더 홀'과 재개봉한 증보판 '지옥의 묵시록:리덕스'를 봐도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더 홀'에서는 4명의 남녀가 지하 벙커에 갇힌다. 그 구멍은 그들이 하는 행동에 따라 함정이 아닌 비상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열쇠가 없어서가 아니라,열쇠를 숨긴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탈출하지 못한다. '지옥의 묵시록:리덕스'의 감독인 프란시스 코플라가 이 영화를 '반전영화'가 아니라 '반거짓말 영화'라고 말하는 것도 전쟁 자체가 아닌 사람의 본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사람 최대의 적은 사람이고,최고의 접전지는 바로 사람 내면의 '어두운 심장'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니 더욱 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는 사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지옥인 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절망이란 '포기하지 못하는 희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사람에게 험한 꼴을 당하고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지옥에서 보내는 것은 이번 '한 철'뿐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하지만 지옥보다 조금 나은 '연옥'에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