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멀쩡한 청바지에 여기저기 구멍을 내고 올을 풀어 입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또 옷을 뒤집은 것처럼 시접이 밖으로 나오거나 천조각을 모아 꿰맨 듯한 넝마같은 의상이 거리에 등장하기도 했다. 젊은이들에게는 환영받았지만 어른들의 혀를 끌끌 차게 만들었던 그 '거지패션'이 요즘 다시 인기다. 패션업계에서 부르는 공식명칭은 '그런지 룩(Grunge look)'. 말 그대로 너저분하고 오래돼 보이는 옷차림을 일컫는다. 그런지 룩이 최초로 패션쇼장에 등장한 것은 지난 93년 미국의 패션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에 의해서다. 당시 브랜드 페리엘리스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던 그는 뉴욕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을 그대로 가져와 패션쇼 무대에 재현해 냈다. 셔츠를 반바지위에 두르고 긴 원피스를 그 위에 입는가 하면 노숙자가 쓰는 것 같은 모자와 끈 풀린 운동화를 착용한 모델이 컬렉션을 장식했다. 당시 패션계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바로 직전인 80년대 말까지 그런지 룩과는 정반대의 '부자처럼 보이는 스타일'이 시장을 주도했기 때문에 충격이 더욱 컸다. 평단의 반응도 극단적이었다. '기존 가치에 반기를 든 뉴 패션'이라는 찬사와 '쓰레기'라는 혹평을 동시에 들었다. 또 소수 젊은이들은 열렬히 추종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외면했다. 시장에서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결국 마크 제이콥스는 페리엘리스 디자인 실장 자리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그러나 8년만에 돌아온 그런지 룩은 많은 이들에게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번 본 옷인 만큼 충격이 덜한 셈이다. 특히 주목할만한 사실은 값비싼 하이패션업계에서 그런지 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90년대에는 거지 패션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크리스찬디올이나 돌체에가바나,캘빈클라인 등의 브랜드가 올 가을에는 앞다퉈 '너덜너덜한 옷'을 선보이고 있다. 물론 가격은 여전히 수트 한벌에 수백만원 하는 고가다. 고급 패션지의 화보 촬영장에서도 비싼 옷을 일부러 찢고 구기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패션전문가들은 그런지 룩의 재등장은 경제적인 상황에 대한 반영이라고 입을 모은다. 좀처럼 침체의 늪에서 헤어날줄 모르는 세계 경제가 그런지 룩을 유행이 지난지 10년도 채 안돼 다시 부활시킨 것이라는 얘기다. 찢어진 청바지나 군데군데 구멍난 자리를 기운 재킷이 언제까지 인기를 얻을까. 첨단 패션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암울한 경제상황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s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