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秘史'] (23) '비밀의 BFC (下)' .. '블랙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BFC는 대우 그룹 자체였다.
'역외 은행'이었고 자금 통제의 중심점이었다.
난마처럼 얽힌 수만건 거래관계를 조율해간 김우중 회장의 빼곡한 노트이기도 했다.
대우가 그토록 오랫동안 BFC의 실체를 비밀에 부쳤고 또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법률의 경계를 넘나들고 국경을 우회해 다녀야 했던 탈법적 거래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탈법거래를 위한 특별계정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김 회장이 유럽을 오갈 때 반드시 들리는 곳이었고 시간이 없을 때는 관계자들을 히드로 공항 인근의 호텔로 불러내서까지 결재를 하던 조직이었다.
국제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이 오직 자금의 마술을 통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바로 BFC다.
김 회장의 훈령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빅딜 협상, GM과 대우차와의 전략적 제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있던 1998년 10월이었다.
(주)대우 국제금융팀의 S씨(당시 이사부장)은 업무차 런던 출장길에 올랐다가 졸지에 BFC 책임자 자리를 떠맡게 됐다.
BFC를 4년 이상 이끌고 있던 L씨가 체이스맨해튼 등 금융기관 관계자들을 데리고 폴란드 FSO공장을 방문하던 도중에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대우의 해외자금을 주물렀던 베테랑 L씨의 갑작스런 사망은 BFC가 현지에 거미줄처럼 엮어 놓은 금융인맥과 관리노하우가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결국 파국으로 이르게 될 BFC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난리였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해외차입선이 속속 이탈하면서 곳곳에서 상환압력이 들어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막연히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는 듣고 있었지만 직접 일을 맡고 나니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고 S씨는 증언했다.
BFC의 해외차입금은 이미 60억달러를 넘고 있었다.
본사의 훈령은 오직 한줄의 지시문이 전부였다.
'GM으로부터 50억달러가 곧 들어올테니 그때까지 참고 견뎌라'
물론 김우중 회장이 직접 내린 훈령이었다.
김 회장은 삼성에서든 GM에서든 5조원 정도만 끌어내면 이 고비를 넘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김 회장은 삼성이 빅딜에 끌려들어 오지 않자 이번엔 GM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바로 이 숫자가 '50억달러'였다.
그러나 이 돈은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BFC의 비전(秘傳)
시간이 지날수록 자금압박을 받자 BFC는 결국 90년대 초부터 부분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감행해 오던 비전의 자금조달 수법을 '전면적으로' 채택하는,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말았다.
하나는 가짜 수입서류를 만들어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계열사 수출대금을 본사로 송금하지 않고 BFC로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검찰조사 결과 BFC는 (주)대우가 허위 또는 이중 수입서류를 작성해 은행으로부터 빌린 25억7천3백만달러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자동차 수출대금 17억8천만달러는 국내로 들어오지도 않고 바로 BFC로 넘어갔다.
여기에 해외법인이 정부의 허가없이 임의로 빌려쓴 돈이 자그마치 20조7천억원이었다.
불법 송금까지 합치면 모두 26조4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자금이 복잡한 계정처리와 더불어 BFC로 집중됐다.
물론 이 돈들이 김 회장의 개인적인 착복이나 유용에 제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우리의 패망비사는 다만 김우중을 비난하고 그를 논죄하는 것이면 충분했을 테다.
땅을 칠 일이지만 이 거대한 돈의 대부분은 빚을 갚고 적자를 메우는데 허겁지겁 탕진됐다.
빚을 갚고 부실 계열사의 다급한 부도를 틀어막는데 피같은 돈들이 들어갔다.
끝내는 패망으로 간 대우였지만 대우를 패망으로 몰아간 엔진이 바로 BFC였다.
법정
지난 3월13일 서울지법 가동 3백11호 법정.
김 회장의 지시를 받아 사실상 BFC를 지휘해온 이상훈 (주)대우 전 국제금융팀장(전무)을 상대로 대검 중수부 김용 검사의 추궁이 시작됐다.
"1997년부터 BFC는 차입금 상환 압력으로 부도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죠?"(김 검사)
"예. 각지에 투자해 놓았던 자금 회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이 전무)
"그래서 (주)대우가 슬로바키아 소재 자동차 판매법인에 수출한 자동차물품 대금 1백75만달러를 98년 3월에 BFC가 관리하고 있던 미국 뉴욕 소재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DWC 101 계좌로 예치해 재산을 국외로 빼돌렸나요?"(김 검사)
"외국환거래법을 어긴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재산을 국외로 도피시킨 건 아닙니다. 어차피 (주)대우가 갚아야 할 차입금의 원리금을 상환하는데 썼습니다"(이 전무)
이 전무의 얼굴에서 회한이 묻어났다.
주머니 돈이 쌈짓돈
취재팀은 대우자동차 실사에 참여했던 회계사 A씨로부터 BFC가 어떤 방법으로 대우차 등 계열사의 손실을 메웠는지 들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이랬다.
우?BFC는 대우차의 판매손실을 메워 준다.
예를 들어 대우차가 대당 1백원에 (주)대우로 넘기면 (주)대우는 1백5원에 해외 현지법인에 넘겨준다.
해외법인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1백10원 이상에 팔아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했다.
해외 법인은 자기가 받은 1백5원보다 낮은 1백원에, 심지어 95원에 팔았다.
그러나 서류에는 1백10원에 판 것처럼 꾸몄다.
팔수록 손실이 났지만 회계장부에는 계속 이익이 발생한 것으로 처리됐다.
이 갭을 BFC가 돈을 빌려서든 다른 계열사 돈을 끌어와서든 메웠다.
연구개발비도 BFC로부터 나왔다.
원래 자동차연구소는 대우차로부터 연구개발비를 받아야 하지만 적자경영인 대우차가 엄청난 비용을 댈 수는 없었다.
결국 BFC가 해외판매 대금을 당겨 놓았다가 다시 대우차를 지원했다.
자금 루트를 이렇게 복잡하게 꼬아놓은 이유는 간단했다.
금융당국의 감시를 받지 않아야 했고 계열사간 자금거래 내역도 외부에는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99년 8월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김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BFC도 그 소임을 다했다.
BFC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면을 바꾼 해외 채권자들과 서릿발 같은 금융당국의 산더미 같은 자료 요청이었다.
당국은 해외채권단과의 협상과정에서 BFC 비밀장부 일부를 공개했다.
그들은 말없이 부채 일부 상환에 동의했다.
[ 특별취재팀=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