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오면 땅이 질척였다는 진고개에서 노인봉까지 2시간여의 야간산행.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은 영상 7도 언저리의 정상부근 냉기에 조금씩 얼어붙기 시작했다. 내리 쏟아지는 별빛, 먼 동해의 어둠속에 점점이 핀 어화(漁花)마저 싸늘해 보였다. 대피소에서의 밤샘은 추위와의 싸움. 페트병 속의 물을 알갱이 얼음으로 만들어버린 한기가 시간까지 붙들어 맨 것 같았다. 오전 6시. 대피소 3백m 윗쪽의 노인봉 정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상까지 이리저리 굽어 난 오솔길로 서둘러 올랐다. 무박 산행길에 나선 진주의 한 산악회원들이 노인의 백발을 연상시키는 정상의 허연 바위덩어리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해무가 드리운 수평선 위 감청색 하늘이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사방으로 끝없이 이어진 오대산 연봉의 바닷쪽 사면도 만개한 단풍의 화려한 색채로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황병산 부근은 계곡 사이사이 구름과 안개가 가득 차 절해의 고도를 연상시켰다. 해발 1천3백38m. 오대산국립공원 청학동 소금강지구 노인봉 정상에서의 가을 해맞이. 침엽수의 푸르름과 절정을 맞은 단풍이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짙은 가을색을 더욱 재촉하는 듯했다. 다시 대피소를 거쳐 청학동 소금강쪽으로 내려섰다. 지난 70년 한국 명승 1호로 지정된 12km의 계곡. 눈이 부시게 화려한 가을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급한 내리막의 좁은 계곡길은 단풍잎새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촉촉히 젖은 흙과 쌓인 낙엽은 카페트를 새로 깔아 놓은 듯 부드러웠다. 낙영폭포~사문다지(계곡)~광폭포~삼폭포까지는 단조로운 급경사 내리막 길. 조금은 심심했다. 다른 계곡산행길에 비교하며 낮은 점수를 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이내 바뀌었다. 곳곳에 놓인 나무난간과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구름다리를 건너 마주한 만물상. 청학동 소금강 계곡미의 진면목은 여기부터라는 듯 탁 트여 왼쪽으로 휜 계곡 정면의 만물상은 갖가지 모양의 바위조각품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은 조형미를 뽐내고 있었다. 거인의 옆얼굴을 닮은 귀면암, 타오르는 촛불형상의 촛대석, 거문고를 타고 있는 것 같은 탄금대, 봉우리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밤에는 달처럼, 낮에는 해처럼 보인다는 일월봉 등이 중간중간 붉은 단풍으로 맵시를 부려 발걸음을 붙잡았다. 이곳을 금강산의 축소판인 소금강이라고 부르게 한 율곡 이이의 '청학산기'가 바로 여기서 탄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만물상 아래쪽의 구룡폭포 물살이 후련했다. 오른편 매봉에서 아홉구비져 흘러내린 물이 소금강계곡을 만나 못다한 기를 토해내는 폭포다. 제일 꼭대기 상팔담(제1폭포)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치려는 사람들을 처형한 곳이어서 사형대란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어 만나는 식당암은 두타산 무릉계곡의 무릉반석을 연상시키는 너럭바위. 마의태자가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밥을 지어먹은 곳이란 전설이 전한다. 이이의 밥상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금강사 아래의 연화담은 선녀들이 목욕을 즐겼다는 곳. 선녀들이 화장할 때 얼굴을 비춰보았다는 면경대바위도 우뚝했다. 사방에서 흘러드는 물이 모이는 십자소는 청학동소금강 계곡트레킹의 묘미를 돌이켜보는 포인트. 계곡 한가득 흩날리는 낙엽, '새미'란 예쁜 이름의 작은 물고기, 묵으로 단풍을 살려내는 무명화가들에 대한 잔상까지 청학동 소금강의 가을분위기를 더욱 짙은 색감으로 물들이며 돌아오는 걸음걸음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오대산=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