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 연세대 교수 / 동서문제연구원장 > "정부는 오늘 땅을 파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십시오.공짜로 일을 시키지 말고 품삯을 주어야 합니다.내일도 사람들을 부르십시오.그리고 오늘 판 땅을 메우게 하십시오. 지금은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지출을 확대해야 합니다.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수요가 부족해서 발생한 침체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에 맡겨두면 언젠가 회복된다고 하지만,시간이 오래 가면 우리는 모두 죽게 됩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맞으며 당시에 무명 경제학자였던 케인스가 여러 신문을 통해 주장했던 외로운 목소리다. 대공황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1929년10월 미국의 주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실업률 24%에 국민소득 40% 감소라는 경제적 재앙을 불러왔다. 일부에서는 이를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순환과정의 하나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당시의 대공황이 잘못된 정책처방에서 비롯된 인재(人災)라고 설명하고 있다. 가장 큰 오류는 역시 케인스의 절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황의 와중에서도 미국 정부는 재정과 금융긴축을 강화했고,이것이 침체를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연준리(FRB)는 물가안정을 내세우며 불황 속에서도 통화공급을 25%나 감소시켰다. 재정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균형재정을 앞세우며 침체기에 재정지출을 더욱 줄인 것이다. 균형재정이 생산과 고용증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기침체로 세수(稅收)가 줄어들자,중산층에 대한 각종 세금을 더 인상했다. 사상최고의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부는 '다양한 세원을 발굴하고,긴축을 강화해 균형재정을 유지'하는 것을 정책목표로 설정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오류가 가능했을까? 생산해서 공급만 하면,수요는 저절로 시장에서 창출된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자유방임적 사상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공급이 부족하던 시대에는 결코 틀린 지적이 아니다. 대공황 속에서도 이런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긴축정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미국 전역에는 후버 대통령을 비아냥하듯 빈민촌 '후버빌'이 수없이 등장했고,실업자는 거리에 가득했다. 이렇게 사경을 헤매던 경제에 최후의 민간요법으로 채택된 것이 바로 케인스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비용을 치르며,재정이 어떻게 경제를 부양시킬 수 있는가를 터득한 셈이다. 대공황 이후 케인스 정책은 수요가 부족할 때마다 등장하는 고정메뉴가 되어왔다. 때로는 과다한 재정지출이 인플레를 유발하는 부작용을 겪기도 했지만,수요가 부족해 시장이 침체될 때마다 케인스는 정부개입의 대명사로 등장했던 것이다. 최근에도 테러사태를 계기로 전세계에서 케인스 정책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미국은 과감한 재정지출과 세금감면,항공산업 지원을 신속하게 밀어붙이고,적극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EU(유럽연합)와 일본에서도 수요부족을 타개하기 위한 케인스 정책이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경제도 침체의 원인이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수요부족에 있다. 따라서 정부의 시장개입이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그러나 케인스적인 정부의 역할이 아직은 효율적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동안의 만성적인 개입으로 '손을 뗄 때'와 '필요한 때'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몇가지 사례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우선 경기침체 속에서도 재정흑자와 세수는 늘어만 가고 있고,민간투자에 대한 규제완화에는 여전히 인색하기만 하다. 지출확대와 세금감면에 소극적이고,기업의 투자확대에 적극적인 유인정책도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통합재정수지의 흑자규모는 올해 8월까지 무려 16조원에 달하고 있다. 연기금 때문이란 설명이지만 공공부문이 경기를 위축시킨다는 지적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근로자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저소득자의 세금은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강조하지만,수요확대를 위해선 중상류층의 세금감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정책효과는 적어도 6개월 이상 기다려야 나타난다. 외부여건을 탓하지 말고,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내년을 준비해야 한다. jeongky@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