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 박동진 <前 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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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은 창간 37주년을 맞아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과 대담을 가졌다.
유석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가 외교협회에서 그를 만났다.
70년대 최장수 외무장관으로, 80년대엔 국토통일원 장관으로 격변기 한국의 대외업무를 관장했던 박 전 장관은 공직을 떠난지 오래됐지만 요즘도 최신 자료를 수집하면서 한국외교의 장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박 전 장관은 남북문제를 비롯한 주변 열강들과의 관계 등에 대해 뚜렷한 소신으로 설명하면서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무엇이 진정한 국익인지를 다시 한번 새겨봐야할 전환기"라고 현 정세를 진단했다.
그는 "외교는 국민의 신뢰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며 "남북문제와 한반도 주변 4강과의 관계설정 문제도 국익과 국민의 신뢰를 최우선의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대담=유석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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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가 다소 어수선합니다.
지난달 9개월 만에 장관급 회담이 열렸지만 최근 남북 이산가족 방문이 삐거덕거리고 금강산 관광을 매개로 한 대북경제협력 열기도 예전같지 않습니다.
현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분명히 작년 6월 남북정상회담때 기대했던 상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북한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긴장완화를 통해 인적 물적 교류를 확대하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남북대화를 정치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습니다.
지금도 이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북한에 대해 무엇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고 봅니다"
―남북관계는 주변 상황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미국보다는 오히려 중국 러시아와의 협력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한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사이가 멀어져 있습니다.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근거리 외교를 강화하는 것은 순전히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입니다.
북.미 관계가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남북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합니다.
러시아 중국이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하고 북한을 설득하면 모르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오히려 북.미 관계가 악화될 때 대비한 외교시나리오를 짜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일 관계의 악화는 역사교과서 왜곡에서도 나타났듯이 '솔직하지 못한' 일본인들의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인 상황등을 냉철하게 볼 때 기본적으로 공존하는 틀을 모색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일본의 오만에 대한 외교적 대응은 단호해야겠지만 너무 감정적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합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지난달 뉴욕 테러사건은 국제사회에서 '독불장군' 행세를 하던 미국이 불의의 일격을 맞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미국은 그동안 이스라엘 편향적인 중동정책으로 일관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검증이 안됐다'는 이유로 그다지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의 외교노선을 어떻게 보십니까.
"부시 정부가 출범이후 보수 강경노선을 걷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집권 초기 표현상의 기술적인 문제와 외교적 센스의 부족으로 실제 이상으로 강경하게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미국도 이번 테러를 계기로 자각을 한 것 같습니다.
테러 발생 초기에 미국 의회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즉각적인 응징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이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대(對)중동 온건노선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그 징조들입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이자 서방의 지도국이기 때문에 '독주'가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테러 이후 과거 적대시해오던 중국 러시아와도 협력체제 구축을 모색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테러 행위에 미온적이거나 테러집단을 보호하는 국가는 적성(敵性)국가로 분류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과거 '민주 대(對)공산 진영'으로 분류되던 국제 사회가 이제 '테러 대(對) 반테러 진영'으로 재편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테러는 범죄일 뿐 국제질서를 형성하는 매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방들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면서 리비아 이라크 북한 등 적대국가들을 '포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측면에서 미국은 얻은 것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중국이 놀라운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임박한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등으로 서방경제체제를 적극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완고한 사회주의 대신 점진적 민주주의 체제를 모색하는 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중국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은 분명 '무서운'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입니다.
다만 중국 체제가 WTO 가입후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는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WTO에 가입한다는 의미는 서방의 '룰'을 따르겠다는 것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중국민들의 욕구를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반(反)사회주의 운동이 출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이 과연 이런 상황을 무리없이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중국은 핵심권력의 세대교체와 함께 유교적 전통을 적절히 활용, '부드러운 사회주의'를 구현함으로써 외부충격에 따른 내부 동요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펼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른바 글로벌 경제 시대입니다.
국가간 상호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반면 무한경쟁으로 국가간 갈등 요인도 상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개발도상국 학자들은 미국 등 서방이 주도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 선진국만 이롭게 한다며 '앤티(anti)-글로벌'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앤티-글로벌' 운동은 논리 그 자체는 일리가 있습니다.
자본의 힘이 국경을 무너뜨리며 마음대로 이동하는 세상에서 미국의 자본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그런 논리가 나올 법하지요.
그러나 개도국은 무조건 피해의식만 가져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자기 나라 내부문제의 근원을 미국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물론 선진국도 개도국을 배려해줘야 하겠지만 후발국도 대세로 굳어진 세계화 추세를 비판만 하기보다는 적극 동참해 활용함으로써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는 슬기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유럽이 단일경제권으로 통합되고 북미 중남미 지역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동북아를 중심으로 지역 경제협력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은 없겠습니까.
"동북아의 경제블록 창설 문제는 사실 오래된 얘기입니다.
그러나 지역내 주도권 다툼이 심하기 때문에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체화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거대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과 고도의 자본력과 기술력을 갖고 있는 일본 사이에서 적절한 보완관계를 모색, 이익을 챙겨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 남쿠릴열도 주변 수역의 꽁치 조업문제로 우리 정부의 외교력이 다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기업들도 통상협상에 임하는 정부측의 태도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꽁치 조업문제는 '따지고 넘어갈 일도 그냥 지나치는' 잘못된 습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주변국들과 낯을 붉히지 않고도 일이 잘 되겠거니 하는 안이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이런 식이면 누가 정부를 믿고 일하겠습니까.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민간은 정부에 의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부를 믿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정부와 민간이 합심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도록 정부가 외교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할 시점입니다"
정리=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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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진 前 외무부 장관 약력 >
1922년 대구 출생
1950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 비서실(경무대) 근무
1961년 외무부 차관
1968년 주제네바 대사
1975년 외무부 장관
1981~88년 11,12대 국회의원
1985년 국토통일원 장관
1988년 주미 대사
1991년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1996년 한국외교협회 회장
2000년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