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은 창간 37주년을 맞아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대담을 가졌다. 재정경제부 차관을 지낸 강만수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이 그를 만났다. 남 전 총리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게 한국이 살 길"이라고 여러차례 강조하면서 "그런 관점에서 재무상태가 우수한 재벌기업에 대해 출자총액을 제한하거나 사외이사를 의무화하는건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분에 넘치는 과도한 복지정책을 지속하고 위정자들이 역사에 기록을 남기자며 (인기영합적인) 좋은 일만 했다간 나라가 결딴날 것"이라며 "지금은 남북문제에 매달릴 때가 아니고 경제에 전념할 때"라고 밝혔다. [ 대담=강만수 디지털경제硏 이사장 ] ------------------------------------------------------------------ △ 강 이사장 =한국경제는 세계 동시불황과 중국의 추격에 의해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한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꼽는다면 어떤 것들을 들 수 있습니까. △ 남 전총리 =우선 과제는 미 테러전쟁으로 인해 초래될지도 모를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처하는 일입니다. 첫째로 물가안정화 대책을 강구하는 일, 둘째로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와 민간투자를 확대하는 일, 셋째로 구조조정 노력을 견지하는 일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런 때에는 앞을 내다보고 과학기술과 물류등 전략부문에 투자를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국가가 생존하려면 (지정학적) 위치가 좋거나 기업하기가 좋거나 살기가 좋아야 합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인 위치는 좋은데 기업하기와 생활환경이 나쁩니다. 지금은 한눈 팔때가 아닙니다. 빨리 규제를 풀어 기업하기 좋게 만들고 살기 좋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강 이사장 ='세계에서 기업하기 제일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외국인과 기업인의 평가에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규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 남 전총리 =규제완화가 안되는 주요 이유는 경제운용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지엽적인 완화에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운용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마찰과 저항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차선책으로 특별법으로 한두곳에 자유경제특구를 만들어 그곳에선 선진국 수준의 개방적 경제관리방식을 실험해 보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 강 이사장 =30대그룹 지정제, 2백% 부채비율 규제, 사외이사 임명의무화 등 미.일보다도 강력한 규제로 기업의 역동성이 상실되고 있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현재의 공정거래정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남 전총리 =우선 불공정거래의 개념과 정의가 무엇인지 명백하지 않습니다. 정부 자의대로 적용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요. 이제 재벌은 해체된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만약 재벌의 연결재무제표상 부채비율을 믿을 수 있고 금융기관이 부채비율에 따라 대출을 엄격히 통제하는 기본 질서가 확립돼 있으면 계열기업에 대한 출자제한 같은 것은 필요없는 규제입니다. 자기 돈으로 무엇을 하든 정부가 관여할 일은 아니잖아요. 또 사외이사 임명은 미국에서도 기업의 자발적 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시장경제하에서 기업집단이 없을 수 없고 그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 강 이사장 =우리 경제가 나가야 할 방향으로 싱가포르와 같은 '물류 허브(Hub·중심)'를 주창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북아 물류센터가 되기 위한 한국의 전략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남 전총리 =중국이 현재처럼 연 7∼8%의 경제성장을 지속한다면 앞으로 10년내에 경제규모가 미국을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전통적 제조업이 중국과 경쟁하기는 매우 어렵게 되고 엄청난 물량이 중국으로 드나들게 될 것인데 이 물류 기능을 한국이 담당해야 합니다. 한국을 동북아의 물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부산 광양 인천 등의 항만을 싱가포르 홍콩 로테르담과 같은 수준의 물류기지로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주도와 영종도를 국제자유경제지역으로 지정해 물류 중심지로 키우는 동시에 세계화의 실험장이 되도록 했으면 합니다. △ 강 이사장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만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 남 전총리 =경기 부양을 위해 단기적으로 어느 정도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경제 성장에 필요한 사회간접시설에 투자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부 빚으로 비생산적 사업을 벌이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국민연금등 각종 사회보장납부금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담세율은 26% 수준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중 최저인데 이 재원으로 선진적 복지정책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사회간접시설을 확충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정치인들이 인기없는 세입증대책을 외면하고 인기위주의셌藪「?치중한 결과입니다. 이러다간 결딴납니다. △ 강 이사장 =금리가 내려도 투자는 일어나지 않고 은행은 예금이 몰려도 대출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금리정책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 남 전총리 =금융이란 원래 위험 부담으로 먹고 사는 업종인 만큼 은행들로선 위험을 기피할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금리인하는 외국자본의 유출, 환율의 상승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금리정책보다는 구조조정이 더 중요한 때라고 보여집니다. △ 강 이사장 =국민의 정부는 재벌과 금융에 대한 구조조정을 추진해 왔습니다만 아직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지금까지의 구조조정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하십니까. △ 남 전총리 =구조조정이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구태여 평가한다면 기본과 원칙을 관철하지 못한데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들과 씨름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낭비됐다고 보여집니다. △ 강 이사장 =외국인들이 한국에 투자하기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강성 노조라고 합니다.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 남 전총리 =노조에 대해선 법을 지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노동쟁의도 법테두리 안에서 해야 합니다. 기업은 경영의 투명성을 높여야 합니다. △ 강 이사장 =일본이나 이탈리아를 보면 아직도 섬유산업의 경쟁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산업을 너무 빨리 포기했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습니다. △ 남 전총리 =첨단기술로 제품을 질과 가격면에서 차별화하고 신상품을 개발해 세계시장의 틈새를 찾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 강 이사장 =지난 97년 외환위기때 '리더십의 공백(Leadership Vacuum)'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지적을 받았는데 지금도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리더십을 확립하기 위해 어떤 일들이 필요할까요. △ 남 전총리 =민주적이고 생산적인 대의정치를 구현하는게 우선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정치가 항상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게 될 것입니다. 집권층이 국세청 검찰 금감위 공정위 등의 권력기관을 정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아직 민주국가라 할 수 없습니다. 통일정책과 관련해서도 자유민주 이외 어떤 다른 이념과 체제에 입각한 통일이 가능한 것인지 명백히 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원수라면 국론이 분열될 경우 국가이념은 뭐고 통일의 기본원칙은 뭐라는 걸 의당 밝혀야 합니다. 지금은 통일을 둘러싸고 논쟁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92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상호체제인정,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경제협력의 원칙을 고수해 한반도에 평화를 유지하면서 평양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경륜은 나라를 경영하는데 우선순위 감각입니다. 이것저것 하다보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지금은 남북문제에 매달릴 때가 아닙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게 급선무입니다. 정리=강현철 기자 hckang@hankyung.com ------------------------------------------------------------------ < 남덕우 前총리 약력 > 1924년 경기도 광주 출생 1961년 미 오클라호마주립대 경제학 박사 1954-64년 국민대 교수 1964-69년 서강대 교수 1969-74년 재무부 장관 1974-78년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1980-82년 국무총리 1983-91년 한국무역협회장 1983년-현재 산학협동재단 이사장 1992년-현재 동아시아경제연구원 회장 1999년-현재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