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우울한 大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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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경문화의 흔적은 대략 기원전 10세기께 청동기시대부터 나타난다.
그 시기에 쌀이 재배되고 있었다는 것은 유적지에서 나온 쌀의 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이나 토기에 찍혀 있는 벼의 흔적이 말해준다.
99년 논산 마전리 유적에선 웅덩이 수로 등 관개시설까지 갖춘 5세기께 계단식 논이 발굴돼 고대 쌀 경작법의 우수성을 드러냈다.
삼국시대엔 쌀 생산이 국가적으로 장려됐다.
고려에 오면 한 때 쌀이 화폐구실도 한다. 조선왕조는 공물을 쌀로 받은 17세기 이후 밭농사보다 논농사를 더 중시하는 정책을 지속해 왔다.
하지만 2~3년에 한번씩 짓던 쌀농사를 매년 짓게 된 것이 15세기였고 모심기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였다.
그만큼 쌀은 귀했다.
그동안 일반 백성들에게 쌀은 보통때 맛보기 힘든 금싸라기 같은 곡물이었다.
"양식은 진작 떨어지고/새로 핀 이삭 여물날 언제런지//날마다 서쪽 언덕에 나물을 뜯어도/허기를 채우기에 부족하다//아이들 배고파 보채는 거야 참는다지만/늙으신 부모님 어찌하리요"
선조때 송순(宋純)의 시 '농가의 원성' 한 구절은 당시 보릿고개의 절박함을 그려놓았다.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를 짓던 시절 거듭되는 한재와 홍수로 인한 흉년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진휼청에서는 죽을 쑤어 먹여 이들을 구제하기에 바빴다.
일제때도 그랬다지만 6·25를 겪은 세대는 보릿고개는 물론 생일에나 쌀밥을 먹던 기억과 씁쓸한 안남미의 맛을 잊지 않고 있을 게다.
올해 벼농사가 11년만의 대풍을 맞았다고 한다.
몇년간 계속된 풍년으로 쌀생산은 크게 늘어난 반면 소비량은 계속 줄어 쌀값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지화자 좋다.
얼씨구나 좋고 좋다"고 풍년가를 불러야 마땅한데 시름에 잠긴 농민들이 안쓰럽다.
'쌀 한 알 보고 뜨물 한동이 마신다'는 속담처럼 어차피 쌀에 너무 많은 비용이나 노력을 들일 수는 없는 시대다.
농가소득을 보장하면서 쌀 산업을 장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책은 없는 것일까.
고광직 논설위원 kj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