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14) '원응 스님(벽송사 조실)'..사람의 本性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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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의 지리산 칠선계곡의 산중턱에 자리 잡은 벽송사 서암(西庵).
"百千江河萬溪流(백천강하만계류)" "同歸大海一味水(동귀대해일미수)"라고 쓴 커다란 돌기둥 2개가 일주문 대신 암자 입구 양편에 떡 버티고 섰다.
암자로 들어서니 바위마다 부처와 보살을 새긴 마애불 천지다.
석굴 전체를 불보살과 연꽃 등으로 조성한 굴법당을 비롯해 노천의 바위면에 새긴 비로자나불과 사천왕,나한들...
단풍으로 곱게 물든 지리산의 가을 정취 속에서 원응(元應.66.벽송사 조실)스님을 만나 암자 입구 돌기둥에 새긴 글귀의 뜻부터 물었다.
"수많은 강과 냇물,계곡물들이 함께 큰 바다에 모이면 한 가지 맛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도 천 사람,만 사람이 각각 생각이 다르지만 마음을 넓히면 누구나 큰 바다같은 부처님 심성에 이른다는 말이지요"
원응 스님은 "사람의 본래 성품은 바다같이 넓은데 다들 조금밖에 쓰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누구나 부처와 같이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업보에 가려 극히 일부밖에 쓸 줄 모른다는 것.
그런데도 조그만 자기에 집착하고 자기도취에 빠져 무한대의 세계에 등을 돌리고 산다는 이야기다.
"무한한 본래성품의 세계,즉 부처님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것이 수행입니다.
사람들이 이웃 간에,지역 간에,국가 간에 등지고 사는 것은 결국 자기에 집착하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에서 '전지전능'이라는 말을 쓰는데 자기를 낮추고,버리고 아집을 깨면 전지전능의 세계로 갈 수 있어요.
이를 위해 나를 버리고 잠재우는 것이 수행이지요"
원응 스님은 그래서 '하심(下心)'을 강조한다.
지난 10여년간 정성껏 조성한 굴법당 앞에도 '하심'이라고 한자로 써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경책한다.
미국의 테러전쟁에 대해서도 "모두 이기심 때문"이라며 "나를 버리고 낮추면 평화로워진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보복하면 맞은 사람은 가만 있나요.
보복은 새로운 보복을 부를 뿐입니다.
억울해도 그것을 억누르는 자기희생과 양보가 필요합니다.
평범하지만 그 길밖에 없어요.
집단이기주의라는 것도 결국은 개인들의 이기적인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거든요"
지난 54년 부산 선암사에서 석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원응 스님은 출가동기부터 남달랐다.
염세도피성 출가가 아니라 불교에 심취했던 아버지가 권해서 절을 찾았던 것.
수덕사 만공 스님한테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화두로 받아 평생을 참구했던 부친은 아들 중 하나는 수행자로 만들고 싶어 했다고 한다.
출가 전부터 원응 스님에게 '이 뭣고'를 화두로 주기도 했다.
원응 스님은 "마침 병을 앓아 요양차 절에 들렀다가 고향집처럼 편안해 평생을 보내게 됐다"며 감회에 젖었다.
"당시 선암사는 수좌계에서 손꼽히는 선방이었어요.
은사 스님의 허락을 얻어 아버님께서 주신 '이 뭣고' 화두를 들고 해인사,김룡사 등에서도 정진했지요.
일본 도쿄의 어느 선방에는 '종교는 묻지 않는다.
참선하라'는 문구를 간판처럼 써놨다는데 맞는 말입니다.
참선은 사람이 본래 가진 심성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어서 특정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요.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본 모습을 보려면 참선해야 합니다"
원응 스님이 이곳 벽송사로 온 것은 지난 61년.지금은 절 마당까지 차가 들어오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다니는 길만 겨우 나 있었을 뿐 인적마저 드물었던 첩첩산중이라 정진하기 딱 좋았다.
그러나 벽송사 주위엔 6·25 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이 즐비했고 절의 건물도 곳곳이 허물어져 분단의 상처가 깊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서암의 도량조성과 화엄경 사경이다.
"마침 서암 주위에 바위가 많아 여기에 도량을 가꾸면 많은 희생자들의 원혼이 극락왕생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처음엔 전기도,차도 들어오지 않아 터만 닦아 놓았다가 지난 88년 찻길이 생긴 이후에 불사를 본격화했지요.
화엄경 사경에 매달리면서는 시력을 잃을 뻔 하기도 했는데 지금도 눈이 불편해 잔글씨는 쓸 수가 없어요"
원응 스님은 "물질이 풍요롭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며 사람이 인정을 주고 받는 것이 지식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고 했다.
많이 가질수록 욕심은 늘어나는 법,지식에 앞서 사람의 마음,순수한 본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옛날보다 교통,통신이 편리해졌지만 사람은 더 바쁘지 않습니까.
현대문명이 대단히 편리한 것 같지만 사람이 전선 하나에 의지해 사는 것 아닌가요.
전기가 없으면 뭐 하나라도 온전히 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물질은 허망한 것입니다"
지리산에만 묻혀 산 지 40년.
산승에게도 혹시 후회스런 일이 있을까.
원응 스님은 "항상 부족한 마음,한 곳으로 매진하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또 하심이다.
한담을 마치고 일어 서는데 벽에 걸린 원응 스님의 글씨가 산승의 마음을 전한다.
"雲白雪白天地白(운백설백천지백·구름 희고 눈도 희고 천지가 흰데 ) 道絶人絶心路絶(도절인절심로절·길 끊어지고 사람 끊어지니 마음길도 끊어졌네)"
함양=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