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기업은 창업주가 불과 4%의 지분으로 회사를 지배하고 있다. 샌디에이고의 피자가게 2층에 사무실을 얻어 창업한 이 회사는 지금까지 줄곧 창업주가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앉아 회사를 이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남과 차남까지 회사경영에 끌어들여 각각 무선인터넷 및 창업투자 사업을 맡겼다. 이사회의 두 자리도 그의 일가가 차지하고 있다. 이 회사가 바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원천기술과 통신칩으로 오늘날 연간 수십억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세계적 기업 퀄컴이다. 한국 같았으면 각종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됐을 법도 하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퀄컴의 기업지배구조를 문제 삼거나 비판하는 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지배구조는 기본적으로 회사가 선택할 사항이고 성과가 좋으면 그게 좋은 지배구조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한 경제부처 장관은 지난달 모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총수 일가가 계열사 출자지분을 지렛대 삼아 불과 5% 내외의 투자지분으로 약 60배에 달하는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면서 "우리 기업의 지배구조는 선진국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삼성전자는 핀란드의 노키아와 함께 전세계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의결권을 대행하고 컨설팅해 주는 ISS라는 미국 기관으로부터 기업지배구조 평가분야의 권위있는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의 기쁨이 가라앉기도 전인 지난 3월 정기주총에서는 오너 일가의 이사발령 등에 대한 소액주주들의 시비로 곤욕을 치렀다.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국내와 해외의 현격한 시각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적은 지분을 갖고 거대기업을 지배하는 사례는 선진국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고안된 주식회사의 성격상 회사가 커질수록 지배주주의 지분율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지배주주가 회사의 경영을 맡고 나머지 주주들은 기본적으로 그 회사에 투자하고 경영을 위임한 사람들로서 경영자의 경영에 문제가 있을 경우 주식을 팔고 떠날 수 있도록 고안된게 주식회사의 특성이라고 김영용 전남대 경제학 교수는 설명한다. 스웨덴같은 나라는 창업주의 경영권을 보호해 주기 위해 의결권차등제도까지 도입했다. 스웨덴의 왈렌버그 가문은 차등주식제도를 활용, 3%의 지분으로 22%의 의결권을 행사하며 세계적인 통신회사 에릭슨의 경영을 지배하고 있다. 오너 경영과 재벌조직은 비효율적이고, 전문화된 독립경영체제만이 최선이라는 시각도 명분은 좋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모두 장.단점을 함께 안고 있는 산업조직의 한 형태일 뿐 정부가 나서서 획일적으로 규제할 사안은 아니다"(정갑영 연세대 경제학 교수) 일본사람들은 한국기업이 90년대 중반 일본의 메모리반도체 회사들을 제칠 수 있었던 이유로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 있었던 오너경영체제를 꼽는다. 일본 재계는 당시 경기가 침체국면으로 접어들자 전문경영인들이 대규모 투자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으며 그로 인해 한국에 추월당했다고 보고 있다. '황제경영'이라고 불리는 폐단은 오너경영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권위주의적 경영방식이 과도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자유기업원 김정호 부원장은 설명한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존 데이비스 교수는 향후 전문경영인들의 역할이 커지겠지만 오너경영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것은 '불건전한 편견'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포춘지 선정 5백대 기업중 3분의 1이 개인 및 가족기업이며 캘리포니아주립대는 가족경영 기업의 실적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좋다는 실증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피카이른신탁회사는 가족경영기업에만 투자하는 펀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SK그룹처럼 경험 많은 전문경영인과 새로운 경영기법을 공부한 젊은 오너경영인이 대등한 관계에서 보완적인 협조관계를 유지하는 사례는 전문경영과 오너경영의 장점을 결합시키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선진국과 같은 비상임 이사중심의 경영체제를 정부가 기업들에 강요하는 것도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선진국가들의 협의체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모든 국가나 기업이 일률적으로 따라야 할 만한 보편적이고 완결된 기업지배구조의 전형은 없다. 기업지배구조는 각국의 문화 소유구조 사업환경 경쟁조건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달라진다"고 결론지었다. 김성택 기자 idntt@hankyung.com ------------------------------------------------------------------ [ 특별취재팀=이희주 산업부장(팀장) 김상철 손희식 허원순 김성택 조일훈 이심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