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저병 치료제로 각광받고 있는 항생제 시프로바이.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은 생화학 테러에 대한 미국의 전쟁을 적극 지지한다면서 시프로의 가격인하를 단행했다. 이것이 과연 자발적인 의사였을까. 미국 정부는 당초 바이엘에 시프로 공급가격의 대폭 인하를 요구했다. 미국내 독점 생산권을 2003년까지 보유하고 있는 바이엘로서는 모처럼 특수를 맞았는데 아마도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그런 바이엘이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시프로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WTO(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 지식재산권 협정(TRIPs)이라든지,각국 특허관련법에 규정돼 있듯이 '긴급상황'이라는 예외적 조건에서 강제실시권 등 특허를 무력화시키는 조항만을 의식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물론 제약특허의 침해라면 매우 부정적인 미국이지만,상황이 다급한 만큼 이런 조항들을 근거로 협박(?)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웬만한 협박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제약회사들이고 보면,상대가 다름아닌 미국 정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지금 바이엘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미국의 14개 소비자단체가 바이엘을 불공정거래 혐의로 제소하고 나선 것이다. 이유는 비슷한 성분이지만 가격이 더 저렴한 시프로 계열 약품의 타사 생산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추가적인 가격인하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지 모른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개도국들은 뉴라운드 출범 선언문에 'WTO의 TRIPs가 의약품 접근을 위한 보건증진 조치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포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그 동안 전염병이나 풍토병 치료제의 부족과 가격문제를 호소했지만 선진국 제약회사들의 냉정했던 반응과 결코 무관치 않다. 물론 제약특허는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탄저병 못지 않은 위험에 처한 힘없는 국가를 대하는 것이 힘있는 정부와 소비자가 있는 국가를 대하는 것과 그토록 차이 난다면 누구를 위한 특허권이냐는 회의감은 증폭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현실 전문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