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해부터 로마제국이 건설되는 해까지의 약 3세기(BC323~BC30)를 헬레니즘 시대로 구분해 부른다. 알렉산더는 불과 12년만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를 격파한 뒤 인더스강 지역까지 진출해 대제국을 건설했다. 정복의 결과는 그리스와 동방의 문화요소들이 혼합된 새로운 형태의 헬레니즘 문명을 형성했다. 폐쇄적 그리스 문화는 개방적이고 보편성 있는 문화로 변했다. 고전시대의 이상주의가 리얼리즘으로 변했다는 말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동방 헬레니즘의 기수'역할을 했던 박트리아(Bactria,BC246~BC138)라는 그리스계 왕국이 있었다. 실크로드에서 인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아프간 북부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박트라(지금의 발흐)를 수도로 삼았던 나라다. 중국인들은 이 왕국을 대하(大夏)라고 불렀다. 알렉산더 대왕 제국이 붕괴된 뒤에는 시리아 왕국의 한 주였으나 주지사였던 그리스인 디오도투스가 스스로 왕이 돼 나라를 세웠다. 한때 번영했지만 반란과 외침으로 대월씨(大月氏)에 정복돼 1백8년간 지속된 왕국은 망해 버렸다.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고 인도문화를 외부에 전파시킨 근거지 역할을 톡톡히 해낸 박트리아왕국은 동서문화 융합의 용광로처럼 독특한 문화를 이룩했는데 이 왕국이 남긴 유산이 그리스 로마풍의 불상 등 불교미술을 총칭하는 간다라 미술이다. '나선비구경'은 박트리아 왕인 메난도로스와 승려 나가세나가 불교교리를 플라톤식 문답형태로 논한 불경으로 동서사상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있다. 전쟁중인 아프간의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 지하 석실에 '박트리아의 보물'2만여점이 보관돼 있다고 영국의 한 신문이 보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옛소련 고고학자들이 78년 왕족들의 무덤에서 발굴한 유물들이다. 유네스코에서 대통령궁 폭격을 피해줄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지만 확약을 받지는 못한 모양이다. 2천여년 전 동서문화교류의 결정인 유물이 폭격으로 사라진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도 없다. 고광직 논설위원 kj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