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도자와의 대화-부시 前대통령] '부시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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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2차대전이후 50년 가까이 지속된 동서 냉전시대를 마감하는 세계정치의 격변기를 이끌어간 지도자로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동서 대결에서 협력시대로 가는 세계사의 흐름을 확고히 하면서 새 시대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했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89년초는 그야말로 세계사가 바뀌던 시절이었다.
소련에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철의 장막을 걷어내고 개방과 개혁을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미국 행정부안에서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진의에 대한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
일부 강경파들은 소련이 미국과 경쟁할수 있는 유일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체제를 재편하는 시도쯤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부시 전대통령은 그의 개방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믿었다.
그의 이런 믿음이 미소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지중해 몰타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난 부시 전 대통령은 개혁과 개방과정에서 혼란이 오고 정치적 기반이 위합받더라도 이를 외교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줬다.
이런 약속이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개방정책에 박차를 가할수 있는 안전판이 됐고 동유럽의 공산주의 시대를 마감시키는 촉진제로도 작용했다.
소련에서 불기 시작한 민주화의 물결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등으로 확산됐다.
급기야 89년 11월9일 동독이 베를린장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세계질서재편과정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역사가들은 부시 전대통령이 이처럼 태풍처럼 몰아친 세계 정치 사회의 격변기에 상대국 지도자들과 "믿음과 존중"의 유대관계를 잘 유지해온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집권기간중 "부드럽고 친절한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심어주기위해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를 존중하는데 헌신하면서 미국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중국과도 비교적 유연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중국이 89년6월 천안문의 민주화시위대를 무참하게 짓밟았을 때 국제적인 공동비난에는 동참했지만 독자적인 제제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74년 주중국 연락사무소장을 지내 중국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강력한 제재를 요구하는 의원들에게 "특정한 사건으로 관계를 악화시키기에는 중국이 너무나 중요한 나라"라고 설득,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미국의 이해관계가 위협받을때는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는 힘의 외교를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은 90년 8월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치기위해 이듬해 초 무려 42만5천명의 군대를 파병했다.
이에 앞서 89년 12월엔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파나마의 실권자 노리에가를 잡기위해 2만5천명의 미군을 동원한 파나마 침공작전을 감행했다.
이같은 작전이 성공할 때마다 국내에서 그의 인기는 치솟았다.
이라크전쟁때 지지율은 90%를 넘기도 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이처럼 정치 외교 군사적으로 숨가쁜 시간을 보내면서 사상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지만 발목부터 적셔들어오는 경기침체의 파도를 뀌뚫는데는 실패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바로 그 무렵,미국 경제는 이미 침체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가 손을 쓰려 할때는 이미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악화돼 재선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역사가들은 그러나 부시 전 대통령이 경기부양을 위해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데 헌신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특히 멕시코 및 캐나다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괄목할 만한 업적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고광철 특파원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