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는 독특한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모든 안건을 통과시키도록 돼 있다. 그래서 회원국들은 이해대립이 첨예한 안건에 대해서는 각료회의 전에 여러 차례의 양자·다자간 사전 협의를 거쳐 이견을 조율한다. 만장일치의 의사결정 구조는 선진국들의 입김에 의해 만들어졌다.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이 개도국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것.'다수결'의 '폭력'에 의해 억울한 피해국가가 나오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뜻'으로 도입된 제도가 때로는 뜻하지 않은 '희생양'을 만드는 부작용도 일으킨다. 이번 회의에서 갑자기 불거진 수산보조금 감축문제가 그런 경우다. WTO 일반이사회의 스튜어트 하빈슨 의장은 각료선언문 2차 초안이 나오기 전날인 지난달 26일 제네바에서 그린룸회의(비공식 핵심 이해당사국 회의)를 열고 수산물 문제의 독립 의제화를 기습적으로 상정했다. 한국과 일본은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주요 수산물 수출국들의 적극 지지에 눌려 의제 채택에 동의하고 말았다. 하빈슨 의장이 수산물 문제를 새로운 의제로 돌연 들고 나온데는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후문이다. 미국 EU 일본 등 세계 통상무대의 '빅 3'에 '고통'을 '분담'시키겠다는 것.그는 지난 9월말 배포한 1차 초안에서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덤핑협상을 의제에 포함시켰지만 EU가 주장한 환경문제는 의제에서 뺐다. EU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자 일본의 '아킬레스건' 가운데 하나인 수산물 보조금 문제를 새로운 의제로 전격 포함시켰다는 얘기다. 미·EU·일이 서로 공평하게 손해를 감수,이른바 '불만족스러운 균형(Balance of Unhappiness)'을 이루도록 배려한 것이다. 문제는 그 불똥이 한국에 튀었다는데 있다. 5?미만의 소형 선박을 가진 영세어민이 전체의 90% 이상인 한국으로선 여간 부담스런 의제가 아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갑자기 날아온 돌에 맞은 꼴이다. '주변국가'의 비애를 새삼 곱씹어야 하는 신세다. 도하(카타르)=정한영 경제부 기자 c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