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앞두고 자결한 이한응(李漢應.1874∼1905년) 주영(駐英) 대리공사가 구한말 주권수호를 위해 영국 정부를 상대로 펼쳤던 '외교투쟁'을 입증하는 외교문서가 16일 공개됐다. 미국 하버드대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보스턴을 방문중인 서울대 김기석(교육학.학생처장) 교수는 "이 공사가 1905년 3월6일 영국 외무성에 접수시킨 외교각서(Memor andom)와 신변보호요청서, 외교훈령(Diplomatic Instruction) 통첩(Note) 등 관련자료 20여건을 영국공문서청(Public Record Office)에서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공사는 고종이 엘리트 외교 관료양성을 위해 1886년 설립한 육영공원 출신으로 영국, 벨기에 공사관 등을 거쳐 1902년 민영돈 초대 영국공사 후임으로 주영 대리공사로 임명된 뒤 1905년 8월12일 영국 현지에서 32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을 매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맞서 순국한 최초의 대한제국 외교관리다. 이 공사가 직접 작성, 영국 외무성에 전달한 `외교각서'는 러일전쟁후 대한제국의 주권보존이 위태로워졌다고 보고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규정한 1902년제1차 영일동맹 조항을 계속 준수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후에도 제1차 영일동맹 준수를 거듭 다짐받고자 외교훈령(3월22일자)과훈령접수에 대한 감사 통첩(4월8일자)을 영 외무성에 접수, 대한제국 주권보장 약정에 대한 영국측의 약속을 이끌어내는 등 뛰어난 교섭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이 훈령 등은 본국 정부가 이 공사와 계속 접촉을 갖고 영국측과의 교섭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시한 내용을 담고있다. 또 그가 자결하기 한달전인 4월12일 산책도중 괴한의 테러공격을 받고 영국 외무성에 요청한 `신변보호요청서'도 공개됐다. 당시 영국언론과 일본 외교문서에는 이 공사가 심한 우울증과 광기로 인해 자살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영국은 같은 해 8월12일 일본과 맺은 제2차 영일동맹을통해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 문항을 삭제, 일본의 강점을 묵인했다. 김 교수는 "이 공사의 끈질긴 외교투쟁과 순국이 일제에 한 압박요인이 되면서제2차 영일동맹을 맺도록 일본측을 자극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번 하버드대 국제학술대회에는 김 교수와 송두율 교수, 북한학자 등 남북한과미,일 등 각국 역사학자 30여명이 참가, 15일(미국 현지시각)부터 4일간 진행된다. 한편 김교수는 당초 이번 자료의 국내공개가 최초라고 발표했다 지난 80년 국내의 다른 교수에 의해 공개됐던 사실이 알려지자 뒤늦게 기존 주장을 번복했다. (서울=연합뉴스) 송수경 기자 hanks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