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모듬회式 대외정책 .. 이동우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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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신도시에 가면 흔히 'OO수산' 같은 간판을 대문짝만하게 내건 횟집을 볼 수 있다.
'동해직송 자연산 반값' 등 구미를 당기는 플래카드 덕분에 개점 초기엔 제법 손님이 몰린다.
이런 유의 음식점은 메뉴판이 빽빽할 정도로 가짓수가 많지만 제대로 맛을 내는 음식이 드물기 때문에 얼마 못가 한산해진다.
초조해진 주인은 '지중해식 해물요리 첫선' 같은 '업그레이드 메뉴'를 내놓는다.
하지만 이미 음식수준에 실망한 손님들은 메뉴 추가에 오히려 식상해한다.
현 정부의 대외경제정책을 쭉 지켜보면서 어설픈 모듬횟집 생각이 떠올랐다.
정부는 지난주 '제주도 국제자유도시안'을 내놓음으로써 출범초기에 내건 '열린 통상국가' 정책비전에 메뉴를 또하나 추가했다.
이번 메뉴는 제주도를 싱가포르 같은 동북아의 비즈니스 관광 쇼핑 허브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으로 세계 일류급 '뉴비전'이다.
이는 국토의 일부를 완전 개방하는 대외경제정책의 일대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뉴는 구미를 당기지만 '과연 제대로 된 요리가 나올까'하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대외정책메뉴는 화려했지만 막상 구체적인 추진단계에 가면 흐지부지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봐와서 그렇다.
'열린 통상국가' 메뉴들을 보자.한·미 투자협정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한·일 투자협정을 거쳐 얼마전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이어 제주도 전면개방계획이 추가됐다.
국제경제학 책에 나오는 대외개방 및 지역전략을 총망라한 셈이다.
총론의 화려함에 비추어 각론은 어땠는지 보자.한·미 투자협정이 상징적인 사례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봄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상호투자활동에 관해 자국민(기업)과 대등한 대우를 해주는 투자협정을 제안,클린턴 대통령의 화답을 들었다.
그러나 실무협상과정에서 스크린쿼터제(국내영화관의 국산영화 의무상영제) 폐지문제가 불거지면서 영화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정부는 맥없이 물러서 버렸다.
어느새 한·미 투자협정은 뒷전에 밀리고 '미국의 통상압력이 영화산업에까지 밀려든다'는 식으로 사안이 변질돼 버렸다.
그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도 한·미 투자협정과 판에 박은 듯이 같은 전철을 밟았다.
양국 정상회담에서 협정추진을 공식화했지만 칠레산 과일 수입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압력에 눌려 여태껏 구체적으로 진척된 게 없다.
한·일 투자협정도 쟁점만 다를 뿐 흐지부지된 상황은 마찬가지.
결과적으로 정부는 이해관계자들의 '컨센서스'를 이끌어낼 조정능력이나 반대세력을 정면돌파할 결단력도 없으면서 오로지 근사한 정책비전을 내놓는데만 열을 올려온 셈이다.
물론 정부는 당대에 다 할 수 없더라도 긴 안목의 정책비전을 당연히 제시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현 정부의 '열린 통상국가' 비전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비전 다음에 이어져야 할 구체적인 정책추진이 '속빈 강정'이라는 점이다.
'열린 통상국가'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일수록 화려한 비전이 너무 앞서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만약 가시적인 성과가 뒤따르지 못해 국민적인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나면 같은 사안을 재추진하기 어렵거나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현 정부는 앞으로 남은 1년동안 단 하나의 정책이라도 구체적인 결실을 보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은 바로 잡았는데도 일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폼재기'와 '생색내기'로 끝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lee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