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따르되 돈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는 장사꾼들을 우리는 가끔 신문의 미담 기사에서 만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이들은 많지 않다. 자연 환경도,건전한 자본주의의 질서도,민족적 삶의 기반도 무시된 채,무슨 사업을 했건 결과적으로 "떼돈" 번 사람들이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이 황금만능 시대가 오기 전의 상인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근대화 이전 시대를 다루는 우리의 소설들을 탐색하다 보면 오늘날과 다른 흥미로운 상인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단행본 시장의 불황을 뚫고 2001년 독서계에 큰 바람을 일으켰으며 드라마로도 방영중인 최인호의 대하장편 "상도(商道)"는 조선조 의주 상인의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거상으로 성장하는 주인공의 행로를 당대 동아시아 경제질서와의 관련 속에 그리면서 다른 한편 올바른 상인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실천하는 탐도(探道)의 길로 설정함으로써 세월을 뛰어넘는 호소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박완서의 '미망(未忘)'에는 그 유명한 개성 상인들이 중심으로 부각된다. '미망'의 뜻은 '잊을 수 없는 것들'이다. 개성 상인의 정신과 그 문화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상업을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겨 사농공상의 위계 맨 아래에 두었던 조선 사회의 질서를 거슬러 상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며 조금의 굽힘도 없었던 개성 상인의 의식은 이미 근대적이었다. 이윤을 얻기에 치열했지만 남을 속이거나 상질서를 해치는 일은 없었고 일확천금의 요행수를 바라 허황되게 마음을 쓰는 일도 없었던 개성 상인의 정신은 천민 자본주의 시대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 같은 개성 상인의 정신을 가운데 두고 겉으로는 소박하지만 안으로는 알차고 화려한 개성의,저 고려조의 영화에까지 가 닿는,오래 되어 깊은 문화를 엮어낸 작품이 바로 '미망'이다. 이 작품으로 비로소 개성이 우리 소설사의 지도에 자리잡게 됐다. 중국 내 조선족 자치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옌볜의 옛 이름은 북간도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카이산툰(開山屯),거기서 조금 더 가면 윤동주와 문익환의 고향인 룽징(龍井),다시 더 가면 옌볜의 주도인 옌지가 나온다. 이 땅 조선족의 역사와 삶을 그린 소설이 안수길의 '북간도'인데 그 전편에 해당하는 작품이 '통로'와 '성천강'이다. 이들 작품에는 함흥과 부산을 오가는 상인들이 나온다. 1900년 전후 시기에 해당하는 이 당시 함경도에서 서울로 오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함흥에서 배로 부산까지 갔다가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수륙 2천리 멀고먼 길을 에돌아야 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일본 자본의 진출이 활발해 부산은 급속하게 상업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함흥과 서울을 잇는 길의 중심이며 상업도시로 급성장하고 있었던 부산을 오가는 상업이 성행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함흥 부산 일본 서울을 연결하는 상업질서가 안정되지 않았기에 그 길 위에서의 장사 또한 불안정했다. 쉽게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쉽게 실패해 큰 돈을 동해 바다에 수장하고 마는 일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함흥 상인의 성패를 빈번하게 오가는 장삿길은 이 같은 시대성의 증언이다. 사농공상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구한말에 이르면 상업은 신분 상승의 가장 확실한 통로로 부각된다. 상업을 통한 부의 축적이야말로 주자학적 질서가 무너져가고 자본주의적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대를 뚫고 솟아오를 수 있는,새롭고 가장 강력한 권력 획득의 의미를 지닌다.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을 누비며 돈을 모았으며 이런저런 장사로 큰 자본을 축적,변방 평안도의 아전이란 최하층 중인 신분의 남루한 옷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의 선두에 서게 되는 인물을 추적한 김남천의 '대하(大河)'가 이를 깊게 다룬 작품으로 문학사에 기록돼 있다. 이 시기 상업은 자본주의 체제 형성기의 새롭고 가장 강력한 권력 획득의 통로였기에 부정적인 요소도 섞여들 수밖에 없었다.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천민성의 틈입이 그것이다. 구한말 전환기 상인들의 현실을 다룬 소설들은 대체로 이 시기 상업의 진취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같은 천민성이 지닌 역사적인 의미를 비판적으로 파헤치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어디 이 시기 상업만의 문제이겠는가. 진취성과 천민성이란 이중적 측면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는 오늘의 우리 상업,기업인들에게도 여전히 회피할 수 없는 과제다. 정호웅(문학평론가.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