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씨(47)의 새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창작과비평사)는 겨울밤에 그린 수묵화처럼 단아하다. 화선지의 여백에 엷은 먹물을 입히듯 그렇게 정갈한 시편들이 담겨 있다. 그 속에서 먹의 짙고 옅음에 따라 몸빛깔을 달리하는 한 폭의 담채화(淡彩畵)가 솟아난다. 이번이 아홉번째 시집이지만 그는 '언제나 처음처럼 서투르고 부끄러운 시작의 어린 마음,초심(初心)으로 시집을 묶는다'고 말한다. '시집을 내면서 무슨 군말이 필요하겠는가. 마치 시집을 내는 것은 죄지은 사람이 벌을 서는 것과 같다'면서 그는 끝끝내 말을 아낀다. 그러나 그 묵언으로 인해 시는 더욱 깊어진다. '꽃 피지 않고 하냥 가는 나무는 없구나/달처럼 무애로 가지 못하고/먼 길,모든 눈은 눈을 만나 한세상 간다/화살이 날고 있는 저 폭양 속을/무채색 그림자와 사라진단다'('청과' 부분) 정겨운 남자와 여자가 말없이 서로의 손톱을 깎아주는 모습을 무성영화처럼 그린 '참새',도시 근교의 식당에 들러 묵묵히 소머리국밥을 먹고 떠나는 남녀의 실루엣을 흑백화면처럼 찍은 '김포 하성 운호가든집에서'도 침묵의 절창이 빚어낸 작품이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관조의 미학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상상력의 고갯길을 굽이굽이 휘어도는 유장함까지 갖췄다. '나는 어느 세월/말 못하는 누군가의 심복이 되어/한생 살다가/다시는/이 세상이 미워서도 싫어서도 아닌데/돌아오고 싶지 않다'('맹인안내견과 함께' 부분) 남과 북의 현실 역시 그에게는 '조용한 외침'으로 다듬어진다. '이 잡는 여인'의 '이웃이 얼어죽는 캄캄한 겨울,오지에 해가 떨어지고 있다'는 대목은 어떤 슬픔의 언어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그런 다음에도 시인은 모든 죄지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벌 받는 일을 자청한다. '세상 아무 죄 없다 하더라도/목조 법기보살 앞에 가서/아들과 꿇어 엎드려 울어야겠다'('해인사를 생각하는 날' 부분)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