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18) '서옹 스님(백양사 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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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국립공원 지역인 전남 장성의 백암산.가을의 끝자락이나마 잡아보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이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백암산 동쪽 기슭의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白洋寺)다.
1천4백여년전 세워진 백제 고찰이요,한국 불교계의 대표적 선지식인 서옹(西翁.89)방장의 수행처다.
경내 설선당(說禪堂)에서 노장(老長)을 만났다.
천진스러울 정도로 티없는 노장의 미소는 가히 "국보급"이다.
"표정이 변함없이 밝으시다"고 인사를 건네자 노장은 "이젠 늙어 버렸어.기운도 없고 그런데 남 보기에만 그래"라며 활짝 웃는다.
70년대부터 노장이 제창하고 있는 "참사람 운동"의 뜻부터 물었다.
"참사람이란 자각한 사람의 참모습이야.자아를 초월한 본성자리요,인간의 진실성을 근원적으로 드러낸 본래의 자기자신이지.무명(無明)과 욕망의 장애를 벗어버리고 분별과 아집을 타파해 '참나'를 되찾으면 나와 남의 대립,시간과 공간의 일체를 초월해.그래서 참사람은 참으로 자유자재하고 절대 평등하며 대자대비하지.우리 스스로 참사람임을 믿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지"
노장이 주창하는 '참사람'은 당나라 때 고승 임제의현이 말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상하,귀천,성인과 범부 등을 초월해 어떤 막힘도 없이 본래 면목에 투철한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왜 노장은 이토록 참사람을 강조할까.
"인류 전부가 참사람인데 그걸 망각하고 살아.자기 자신이 참사람인데 환경에,과학문명에 끄달려서 노예가 되고 제정신이 없이 살지.그게 문제야.우주가 모두 조화돼서 서로 의지하고 힘과 은혜를 입고 사는데 인간들은 대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한다고 해.그래서 환경을 파괴,오염시키고 생태계를 죽이고 사람도 못살게 만들잖아.인간은 여러가지 훌륭한 능력이 있는데도 욕망 때문에 타락하고 싸우는 시대가 된 거야"
노장은 물질문명과 과학만능주의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 문명의 바탕에는 인간이 대자연을 지배한다는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성적 인간에서 욕망적 인간으로 전락해 비극적 종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오늘날 세상은 온통 싸움 뿐이야.신문에도 온통 싸우는 이야기뿐 인간다운 게 없어.그러면 인류가 멸망해.지금 인간들이 온 인류를 다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고 있는데 투쟁철학과 과학기술이 만나면 인간도 대자연도 다 죽어.참으로 위기야"
노장은 "맹수도 자기들끼리는 싸우지 않는다"며 서로 싸우고 죽이는 사람들을 질타했다.
모두가 참사람이 돼서 자유자재함과 자비심으로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노장은 양정고보에 다닐 때 무교회주의자였던 김교신 선생의 영향으로 간디 자서전을 읽다가 불교에 입문했다.
이후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거쳐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의 지도를 받은 뒤 일본 교토의 임제대에서 유학했다.
해인사 동화사 파계사 봉암사 등 여러 선방에서 정진했고 지난 74년 조계종의 제5대 종정도 역임했다.
노장에게 견성(見性)이나 확철대오의 그 자리를 봤는지 물었다.
"그 자리에 가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어.했느니 안했느니 하는 것도 초월해버리니까.
그게 다 분별이거든"
그래도 궁금해서 견성한 때가 언제냐고 다시 물었더니 노장은 "서른살쯤에 처음 그런 경험을 했다"고 했다.
의식도 무의식도 초월한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그러나 깨달음이란 한 번의 견성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화두참구를 통해 점차 깊이를 더해 간다는 설명이다.
깨닫고 나면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했다.
"변화가 있지.'나'라는 아집이 없어져서 무아가 되고 모두 우주와 통해 버려.나라는 것을 고립,대립시키지 않으니 아주 달라지지.그리고 그 자리엔 시공이 없고 자유자재해.우주가 모두 한 생명체가 되니까 자비심이 절로 우러나게 되지"
그래서 웃는 모습이 이렇게도 천진한 것일까.
노장은 "모두가 자기의 참모습을 깨달을 수 있고 하면 되는데 눈앞의 일에 끄달려서 하지 않으니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올바르게 살려는 마음을 내는 것,발심(發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럼 고통은 왜 생기는 걸까.
노장의 답이 허를 찌른다.
"그럼 즐거운 건 왜 생겨.행복이 있으니 불행이 있고,즐거움이 있으니 고통이 있고,다 붙어 있어.악하고 선하고 즐겁고 고통스러운 걸 초월해서 자유자재한 그 자리에 살면 현실은 그대로 있는 데도 걸리지 않아"
노장은 수좌들에게 늘 "인간의 참모습을 해결하는 건 조사선(祖師禪) 뿐이니 조사선을 살리는 게 우리 책임"이라고 다그친다.
지난 98년부터 고불총림에서 지위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한 데 모여 서로의 경지를 묻고 답하는 무차선회(無遮禪會)를 2년마다 여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한담을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산책 겸 마당에 내려선 노장이 대웅전 뒤편에 솟은 백학봉(白鶴峯)을 가리키며 "저 바위는 참 좋아"라고 했다.
무차선회에서 대중들과 법거량(法擧揚)하며 백암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할(喝)을 뿜어대던 노장의 기상과 바위가 닮아 보였다.
장성=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