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우리바나나 소동과 FTA..安世英 <서강대 국제통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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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바나나는 서민은 엄두도 내기 힘든 고급 과일이었다.
그때 순진한 소비자는 바나나가 딴 나라에서도 그렇게 비싼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날 길거리에 흘러 넘치는 바나나를 보니 이것은 정부의 높은 수입장벽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 땅에서 재배한 국산바나나를 먹자는 말은 그 당시는 상당히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우리 바나나(?)'라는 것이 외화로 수입한 값비싼 기름으로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것이었다.
턱없이 비싼 바나나를 먹어야 했던 소비자만 우롱당한 셈이다.
백보 양보해 이같은 소비자 희생으로 국제경쟁력 있는 바나나산업이라도 육성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정부가 계속 수입을 막아줄 줄 알고 막대한 시설투자를 한 바나나 재배농가도 그후 대세로 불어닥친 개방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이같은 '우리 바나나 소동'은 농산물개방에 대해 정부가 소신없는 통상정책을 펼치면,국민은 물론 종국에는 농가까지 손해를 본다는 귀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깨우쳐 줬다.
그런데 이번에는 포도를 놓고 비슷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거의 성사 단계에 이른 줄 알았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협상이 포도 배 사과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농산물개방이 늘 협상의 걸림돌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이번의 경우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우선 계절이 정반대인 칠레로부터 포도 수입으로 크게 위협을 받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제철에 나는 여름철 포도가 아니라,겨울철에 기름 때서 키우는 소위 '시설포도'라는 것이다.
또 사과와 배도 지금 당장의 문제가 아니라 칠레가 앞으로 우리 과일과 경쟁할 맛있는 사과와 배나무를 심어 수출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이같은 어이없는 이유 때문에 칠레와의 협정을 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 나라는 세계 12위의 통상국가로서 부끄러운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이 싱가포르와 손을 잡음으로써 우리나라는 WTO 회원국 중 몽골과 함께 유일하게 다른 나라와 지역무역협정을 맺지 않은 나라가 된다.
중국경제의 부상은 대륙에 한정되지 않고 동남아 화교경제권까지를 하나로 묶는 거대한 '황화경제권'으로 팽창하고 있다.
이에 발빠른 싱가포르는 이 황색돌풍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일본에 손을 내밀었고,일본은 농산물 이슈가 없어 개방의 충격이 작은 싱가포르와 손을 잡았다.
이제 한국의 선택은 황화경제권에 일방적으로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의 급팽창을 견제하고자 하는 일본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정부는 미국 일본 칠레 등과 협상을 해오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성사 가능성이 큰 나라는 칠레다.
흔히 통상정책은 대외협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역무역협정에 이르면 개방에 따른 이해집단의 반발을 극복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큰 정책이 된다.
자유무역협정은 말 그대로 시장을 활짝 열고 서로 주고 받는 것이기에 당연히 개방으로 이익을 보는 승자(winner)와 손해를 보는 패자(loser)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두 집단이 똑같은 정치적 목소리를 내주면 정부는 참 편하련만,칠레와의 경우처럼 전자 자동차 등 승자산업은 무임승차의 기회를 엿보며 침묵하고,생존권을 위협받는 과일재배농가는 거세게 반발한다.
이에 정부의 역할은 국익에 대한 확고한 정책의지를 가지고 승자와 패자간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만약 이 정도의 능력도 없는 정부라면 엄청난 반발이 뒤따를 미국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성사시킬 것 같지 않다.
앞으로 정부와 정치권은 아무리 개방의 반발이 거세더라도 WTO체제 속에서 정말 끝까지 보호할 자신(!) 있는 패자산업만을 보호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부란 과거 우리 바나나 해프닝 때와 별로 변한 것이 없는 농림부를 말하며,정치권이란 사과와 배를 특정지역 표밭과 연결시키는 정치가를 말한다.
하지만 가장 큰 실망은 멋진 통상정책을 펼치겠다고 국민의 정부와 함께 태어나 각 부처간의 통상갈등을 국익차원에서 조정해 나가야 할 통상교섭본부에 가지 않을 수 없다.
syahn@cc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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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