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도시인들이 같은 방향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바탕화면에는 두터운 마티에르가 느껴지는 하얀 벽돌색의 벽만이 존재한다. 이들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 상하의 옷으로 인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얼굴 없는 형상일 뿐이다. 우리의 인생이 좋든 싫든 간에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의 행로도 되돌아올 수 없는 '원 웨이'(one way)인 셈이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유영준씨(54)의 작품 소재는 옷이다. 3백호크기의 6점을 연결한 대작 '인생의 벽'에 등장하는 옷은 한지에 커피가루를 섞어 바른 후 두터운 아크릴 물감으로 붓질을 한 것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느껴진다. 무한시간을 의미하는 벽의 바탕화면과 어울려 독특한 이미지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7년만에 국내 개인전을 갖고 있는 유씨는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30년 가까이 작업활동을 벌이고 있는 재미 작가. 그가 옷을 소재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고 한다. "95년 어머님 장례를 치른 후 장롱을 정리하다가 어머님이 평소 입던 옷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옷은 어머님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체험하게 됐습니다" 작가는 이때부터 옷을 모티브로 구상작업으로 전환했다. 세월을 담고 세월 속에서 해진 옷들에는 시간과 역사가 깃들어 있고 현재의 우리를 형상화시킨 상징들인 것이다. 유씨는 떠나간 주인의 영만 남아있는 옷에 대해 "비어있기 때문에 감정을 채울 수가 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는 출품되지 않았지만 작가는 옷과 함께 책상 머리빗 등을 소재로 삶의 여정을 개성있는 이미지와 화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31일까지.(02)720-5114 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