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싱가포르 모델'은 왜 고장났나. 한국의 상대적인 선전(善戰)을 어떻게 봐야 하나. 동남아의 학계와 경제계는 이 화두(話頭)를 놓고 토론이 한창이다. 현지 전문가들은 한국과 다른 나라의 발전 전략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는다. 싱가포르 국립대학 경제학부의 초이 킨 멍(蔡建明) 교수는 "한국은 자동차 전자 조선 석유화학 섬유 등 거의 전 산업분야에 걸쳐 수입대체 전략(substituting strategy)을 채택했다"며 "이것이 외자 중심의 보완전략(complementing strategy)을 채택한 싱가포르 등과의 차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가 대표적인 분야. 한국은 1970년대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면서 삼성전자가 독자 자본을 구축한 반면 대만 최대의 TSMC사는 대만 정부와 네덜란드 필립스사가 각각 48%와 27%의 지분을 합작, 출범했다. 무역 부문에서도 '노선 차이'는 뚜렷했다. 대만은 전체 무역의 50% 이상을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 일본계 종합상사들이 떠맡고 있다. 한국이 70년대 종합상사 제도를 도입해 '국적 있는' 수출 드라이브를 걸어온 것과 대조적이다. 싱가포르는 더욱 적극적인 '편승 전략'을 도입했다. 이 나라 최대 제조업종인 전자산업에는 루슨트테크놀로지 맥스터 게이트웨이 후지쓰 히타치 등 미.일계 다국적 기업들이 총출동해 있다. 금융 부문도 JP모건 메릴린치 CSFB 스미토모 등 외국계 금융회사들의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초이 교수는 "선진국 경제가 순항할 때는 보완 전략을 채택하는게 유리하지만 유사시엔 '산업 주권'을 제한당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선진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들이 불황기에 축소경영이나 구조조정을 단행할 경우, 이들 기업의 현지 법인에 산업을 의존하는 국가는 수동적으로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싱가포르와 대만이 요즘 급격한 충격을 받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라는 설명이다. 물론 대체 전략에도 약점은 있다. 자본.기술이 충분히 축적돼 있지 않은 후발국이 외국으로부터 선진 기술과 자본을 들여오려면 대규모 차관 도입 등으로 외채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지난 97년 기준 GDP(국내총생산) 대비 외채 비중이 대만은 9.3%에 불과했지만 한국은 25.5%를 기록,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게 단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