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하이테크 산업의 중심지 실리콘밸리는 21세기 첫 해를 "좌절과 도전" 속에서 보냈다. 지난 해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로 대부분 기업들의 매출이 떨어지고 적자를 면치 못하자 대량감원 등으로 구조조정에 나섰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결국 문닫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경기 침체와 9.11 테러의 충격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기술과 사업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져 실리콘밸리의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좌절은 연초 일어난 사상 초유의 단전 사태에서 비롯됐다. 지난 1월 17일부터 약 1주일간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인 산타클라라 카운티를 비롯,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에 전력 공급이 중단된 것이다. 이같은 단전 사태는 대량 해고와 폐업이 확산되면서 전력 수요가 줄어든 4월까지 계속됐다. 연일 이어진 감원과 폐업 소식 역시 실리콘밸리 사람들에게 좌절을 맛보게 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형성된 "신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하루 40여명씩 새로운 백만장자가 나온다고 했던 이곳이 실업자가 넘쳐나는 "폐허"로 변한 것이다. 올해 10월까지 인터넷 기업의 해고자 수는 9만5천6백21명.(챌린저,그레이 앤드 크리스마스 집계) 하루 평균 3백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계산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백%나 늘어난 수치다. 해고 바람이 절정에 이르렀던 지난 4월에는 무려 1만7천여명이 직장을 잃었다. 한때 수그러들던 해고 바람은 9.11 사태 이후 다시 거세지고 있다. 9월 해고자수는 2천9백명에 그쳤으나 10월에는 4천8백여명으로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호황기에 1.6%라는 기록적인 저실업을 유지하던 실리콘밸리(산타클라라 카운티 기준) 실업률은 6.6%(11월)로 치솟았다. 해고를 앞세운 구조조정을 통해서도 회생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 기업들은 결국 문을 닫게 됐다. "폐업 러시"가 일어난 것이다. 웹머저닷컴 집계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 11월까지 문닫은 인터넷 기업은 모두 5백12개다. 이는 지난해 전체(2백23개)보다 2배 가량 많은 수다. 인수합병된 회사도 1천1백개(4백억달러 규모)에 이른다. 장난감 온라인 판매사이트 e토이즈,포도주 온라인 판매사이트 와인닷컴,인터넷으로 주문한 생필품을 가정까지 배달해주는 비즈니스를 하던 웹밴 등이 닷컴 붕괴의 파도에 휩쓸려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세계 최대 웹호스팅 업체인 엑소더스는 영국 통신회사인 케이블앤드와이어(C&W)에 매각됐으며 미국 최대의 초고속 인터넷서비스 업체인 익사이트앳홈은 내년 2월 문 닫기로 했다. 실리콘밸리 사람들은 재기를 시도하면서도 좌절을 맛볼 수 밖에 없었다. 실직이나 폐업의 아픔을 딛고 새 비즈니스를 시작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창업과 실패,그리고 재도전은 실리콘밸리가 움직이는 기본 사이클이었다. 또 엄청난 자금을 가진 벤처 캐피털들이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해왔다. 하지만 올들어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벤처캐피털들이 몸을 사리는 바람에 자금을 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벤처원과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공동 집계에 따르면 올해 미국 벤처캐피털의 투자 금액은 지난 9월말까지 2백54억달러에 불과했다. 올해 말까지 약 3백억달러에 그쳐 지난해(9백억달러)의 3분의 1수준에 머물 전망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바이오테크와 나노테크놀로지를 비롯한 신기술의 사업화가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보안,초고속인터넷,휴대폰 위치정보서비스 등 새로운 비즈니스도 주목받으면서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전통적으로 자생력을 가진 지역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새 기술과 비즈니스를 만들어내 활로를 찾아왔다. 70년대의 반도체,80년대의 컴퓨터,90년대의 인터넷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바탕에는 첨단 기술을 가진 고급 두뇌와 벤처캐피털 등,지역 내에 형성된 강력한 네트워크가 있다. 이는 세계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 실리콘밸리는 새 도전에 나섰다. 21세기를 여는 새 기술을 찾고 있다. 그 도전의 성공 여부에 실리콘밸리와 미국 경제,그리고 전세계 경제의 미래가 걸려있다. 정건수 특파원 ks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