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미국 IT경기 침체와 세계적인 불황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대륙'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중국이 대만기업들의 신규투자 자금을 쓸어가다시피 하고 있다. 전형적인 산업 공동화요, 대만 경제의 대륙편입 현상이다. 원인이 그렇다면 전망은 비관적이다. 중국이 아시아의 제조창으로 자리를 굳혀갈수록 소위 '대만현상'은 한국 등 아시아 인근국으로도 번져갈 것이 뻔하다. 우리가 대만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이베이시 중심가인 둔화난루(敦化南路)에 있는 청핀(誠品)서점.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이 서점의 외국어 서적 코너가 최근 새로 꾸며졌다.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주요 외국어 교재를 밀어내고 상하이어(上海話) 광둥어(廣東話) 교재가 목 좋은 곳에 전진 배열됐다. '상하이 진출을 위한 필수과정(前進上海 必備課程)'이라고 쓰여 있는 책을 꺼내봤다. 헤어질 때 인사말이 중국 표준어(만다린)로는 '짜이지엔(再見)'이지만 상하이 말로는 '차이웨이(哉威)', '괜찮습니다'를 뜻하는 만다린의 '메이콴시(沒關係)'가 상하이에서는 '무마궤이이(姆女馬規一)'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만다린을 쓰는 대만 사람들에게 상하이말은 외국어와 다를게 없다. 서점의 외국어 코너 안내원은 "요즘 상하이어 등 대륙의 주요 방언 교재들이 영어나 일본어 학습서적 못지 않게 많이 팔려나간다"며 "기업들 사이에 가속화되고 있는 대륙 진출 붐을 그대로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고도 성장가도를 질주하면서 '시장'으로서의 매력이 커지고 있는 중국 대륙. 그 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대만 기업들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대만 정부가 완강하게 고수해온 대륙 투자제한법마저 녹여낼 정도다. 대만 정부는 그동안 기업별 대(對)중국 직접투자액이 5천만달러를 넘을 수 없도록 빗장을 걸어왔다. 그러나 지난달 6일 이 상한선을 내년 1월부터 전면 철폐한다고 공표했다. '생존을 위해서도 대륙 진출은 불가피하다. 정부 규제를 철폐하라'는 기업인들의 집요한 요구에 굴복한 것. 현지 언론들은 이 조치로 대만 기업들의 대륙 진출 열기가 더 한층 끓어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 기업들의 대륙 투자 규모(승인 기준)는 올들어 지난 9월말까지 21억2천만달러 어치. 1999년 한해 실적(12억5천만달러)을 이미 배 가까이 넘어섰고 작년 전체 실적(26억1천만달러)에도 바짝 다가섰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기술이나 자본 집약도가 낮은 섬유 신발 완구 등 경공업 위주였다는게 위안거리였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5일 대만의 주요 신문들은 최대 반도체회사인 TSMC사의 '대륙 진출 선언'을 크게 보도했다. 이 회사의 쩡판청(曾繁城) 부사장이 대륙에 공장을 짓기로 결정, 상하이를 비롯한 몇몇 지역을 후보지로 물색중이라고 밝힌 것. 쩡 부사장은 "국제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대륙 진출을 더이상 미룰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급물살을 타고 있는 기업들의 대륙 진출은 대만 경제에 크게 두 가지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 첫째는 급속한 산업 공동화(空洞化) 문제다. 대만 기업들이 중국으로 대거 빠져 나가면서 대만내 폐업이 급증하고 있다. 올들어 지난 9월까지 대만 정부에 접수된 폐업신청건수만도 3천9백12건에 달한다. 더욱이 외국 기업에 의한 대만내 직접투자(FDI) 규모가 대만 기업의 해외 투자규모를 훨씬 밑돌고 있다. 1990년 이후 외국인 FDI가 대만의 해외 투자를 웃돈 것은 95년 단 한해에 불과하다. 대만 주재 한국 상사원들은 대만의 산업 공동화에 따른 타격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LG상사 대만법인의 이경섭 총경리는 "석유화학과 전자제품 등의 대만내 주문량이 올들어 40% 이상 급감했다"며 "대만 경제의 요즘 위기는 미국과 IT 경기의 불황 같은 외부 문제에 앞서 국내 산업의 공동화라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에 기인한다"고 잘라 말했다. 대만 기업들의 '대륙행(行) 러시'는 '대만 경제의 대륙 편입'을 한층 앞당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더해 주고도 있다. '경제로 정치를 포위한다(以商包政)'는 중국 정부의 대만 통일 전략이 적중해 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높아지고 있는 것. 대만 행정원 경제건설위원회의 왕자싱(王家興) 연구위원은 "그렇다고 기업들의 중국 진출을 막을 현실적인 방법도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대만 정부의 고민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정작 두통거리는 대륙 등지로 생산기지를 옮긴 기업들이 이익금을 국내로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 공식 통계는 없지만 중국으로 빠져 나간 대만 기업들의 이익송금 규모는 전체 이익금의 10%에도 못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 유보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이익금을 홍콩 등 제3국에 돌려놓고 추가적인 해외투자 기회를 엿보는 기업들이 늘어난 탓이라는 설명甄? KOTRA 베이징 무역관의 박진형 관장은 "대만 정부가 관련 세율을 대폭 낮추는 등 대책을 검토중이지만 대만 경제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살아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타이베이=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