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요? 동진출가(어린 나이에 출가함)했지만 그동안 수행했다고 말하기조차 부끄럽지요. 살아온 날은 많고 앞으로 갈 길은 너무 짧은데 이 나이에 회장 맡아서 돌아다녀서 되겠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서울 삼선동 1가 주택가 언덕 위의 정각사(正覺寺).이 절 주지 광우(光雨.76.전국비구니회 회장)스님은 평생 수행의 경지에 대해 "아직은 은산철벽(銀山鐵壁) 앞"이라며 파안대소한다. 스스로 돌이켜 언제나 부족하고 미흡하다고 여기는 자세는 초발심(初發心) 그대로다. 광우 스님은 비구니계의 원로다. 15세 때 상주 남장사로 출가한 이래 법랍(출가 후 햇수)만 환갑 진갑을 넘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자기수행은 물론 포교에 앞장서 왔고 근년에는 서울 수서지역에 비구니회관을 짓느라 애쓰고 있다. 공사가 얼마나 진행됐는지가 우선 궁금했다. "지금 한 90% 정도 진행됐습니다. 건평 2천5백60평에 지하 2층,지상 3층 규모인데 올해 안에 공사를 마무리할 겁니다. 내년 봄에는 문을 열어야 하니까요" 비구니회관은 6천∼7천명에 이르는 비구니들의 근본도량이다. 숫자는 비구보다 많은데도 본사급 사찰하나 없는 게 비구니계의 현실.'1백세 비구니라도 새로 비구계를 받은 비구를 보면 일어나 맞고 절해야 한다'는 등의 비구니 팔경법(八敬法)이 비구·비구니 간의 불평등을 초래했다. "부처님 당시에 비구승단이 먼저 생긴 뒤 비구니 승단이 생기면서 팔경법이 만들어졌지요. 만일 비구니 승단이 먼저 생겼으면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팔경법을 제시했을 겁니다. 팔경법이란 비구는 높고 비구니는 열등해서가 아니라 교단에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팔경법에 따른 인습이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은 거의 같이 절을 해요. 옛날하고는 많이 달라졌지요" 자칫 선의(善意)가 왜곡될까 조심스러운 태도다. 다만 "앞으로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자비행이 필요한 시대"라며 "비구와 비구니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같이 굴러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구든 비구니든 출가자로서의 수행과 전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광우 스님이 출가한 것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걸 보고 나서다.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진학에 실패한 뒤 남장사에서 전갈이 왔다. 당시 남장사 조실이며 아버지인 혜봉 스님(慧峰)이 "절에 와서 공부하라"며 불렀던 것이다. 절에 가보니 여름이라 선방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스님들이 벽을 향해 돌아앉아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선방 앞에까지 가서 훔쳐보다 혜봉 스님의 엄한 눈초리를 받고는 물러났다. "나중에 방선(放禪·참선 중 휴식시간) 때 제 방으로 오신 큰 스님한테 왜 그렇게 앉아있는지 여쭤봤지요. 그랬더니 큰 스님이 저를 불러요. '예'하고 대답했더니 '대답하는 그 놈이 무엇이냐'고 하시는 겁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보다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바로 그 걸 찾고 있는 거야'라고 하셨어요. 바로 쳐 주신 것이지요" 광우 스님은 사상 첫 비구니 대학생이기도 했다. 교화를 하려면 교화 대사장들이 알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겠다고 판단했던 것."광우는 참선할 근기(根機)"라는 혜봉 스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녔다. 삭발승이 학교에 다니면 거북해하던 시절이라 머리를 짧게 기르고 남자옷을 입은 채였다. 졸업 후에는 대전 복전암,서울 보문사 서별당,대전 세등선원,남장사 등에서 정진을 거듭했고 지난 58년 서울에 정각사를 세워 도심포교에 나섰다. 광우 스님은 평생 참선수행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참선만이 제일"이라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경전이든 염불이든 다 성불에 이르는 통로라는 얘기다. "법화경 보문품 중송에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관세음보살의 힘을 생각하면 모든 고난을 다 면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관세음보살의 힘이란 바로 자비입니다. 나를 해치고 모함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자비심으로 대하면 상대방의 악한 마음이 눈녹듯 사라져요. 관세음의 자비와 나의 자비가 둘이 아닌 경계에 이르면 그 사람에게 재난이 있을 수가 없어요" 광우 스님은 "때로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스스로 관음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스로도 탐진치(貪瞋癡·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를 없애고 보살행을 잘 하고 있는지 수시로 반조한다. "한번은 손을 씻다가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이 너무나 무서워서 놀랐어요. 수행자답게 맑은 기운은 감돌지 않고 무서운 얼굴만 있는 겁니다. 진심(瞋心·성냄)을 내는 것은 일기진심수사신(一起瞋心受巳身·한번 성을 내면 뱀의 몸을 받게 된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행에 장애가 돼요. 진심이 심하면 건강도 좋지 않고 행동과 얼굴에 나타나거든요" 광우 스님은 "마음을 비우고 자기를 들여다보면 허물투성이"라며 "천지(天地)는 여아동근(與我同根)이요 만물(萬物)은 여아동체(與我同體)"라고 했다.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니 분노가 어디 있고 욕심이 어디 있으랴.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에 겨울 바람이 매서운데도 대웅전 앞 마당까지 내려와 객을 배웅하는 노스님의 인정이 마냥 따뜻하기만 하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