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9년 의약분업 시행을 놓고 전국이 들끓었을 때의 일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올라간 의약분업 관련 최종 보고서는 두 장이었다. 앞장에는 의약분업 실시안이, 뒷장에는 시행보류안이 적혀 있었다. 정책의 시행 여부는 종이 한장 차이에서 판가름 났으나 그 파장은 어마어마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니면 말고' 식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시행된 의약분업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고됐던 셈"이라며 "백년대계의 준비 아래 추진됐어야 할 의약분업 정책이 얼마나 졸속으로 시행됐는지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토로했다. 충분한 여론 수렴과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도입된 의약분업 정책은 정부와 국민 모두에 깊은 상처만 입혔다. 분업의 두 주체인 병원과 약국업계 양쪽의 눈치를 살피며 만들어진 관련 법규는 양쪽으로부터 모두 '성에 차지 않는다'는 반발을 샀다. 결국 김 대통령이 나서서 "모두 다 내 잘못"이라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사태로까지 발전됐다. 김대중 정부가 대표적인 개혁정책으로 추진했던 의약분업은 왜 '실패작'으로 귀결되고 말았는가. 전문가들은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정책결정 메커니즘'을 주범으로 꼽는다. 생색이 날 만한 정책이다 싶으면 청와대와 행정부, 집권당이 앞뒤 가리지 않고 '입질'에 나서다 보니 '사공 많은 배' 꼴이 되고 만다는 지적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가 얼마전 "청와대 비서진은 참모역할만 해야한다"며 일침을 가한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청와대 경제수석의 경우 직급상 차관급에 불과하지만 경제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경제부총리를 능가한다. 최근 대기업에 대한 규제완화 조치를 둘러싸고 당정 간에 끊임없이 불협화음이 새나왔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10월 30대그룹 출자총액제폐지가 현안으로 불거져 나왔을 당시 민주당측에서는 "당이 정부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보조기관이냐"는 노골적인 불만까지 터져나왔다. 30대그룹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와 주5일 근무제도입 여부를 놓고 당정 간에 한달 이상 수차례 논의가 분분했지만 '사공 싸움'에 말려 결론은 마냥 늦춰졌다. 이런 식의 당정회의에 일반 국민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건 당연하다. 올 들어 10월말까지 열린 71차례 당정회의 안건중 대부분이 민생과 직결된 것이지만, 제대로 결론이 난 것을 찾기가 힘들다. 지난 6월 주택가 이면도로의 주정차 단속 강화 문제를 놓고는 고건 서울시장과 민주당 이상수 원내총무 사이에 알력이 불거져나오는 바람에 시민단체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서울시는 주택가 교통난 완화를 위해 주차단속 공무원수를 1천7백명에서 1만7천명으로 늘리겠다고 했으나 민주당측은 "골목의 민심 악화를 고려해야 한다"며 주차단속 요원을 늘리는데 반대했다. 이런 당정회의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행정부가 국회, 특히 여권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국회에서 관련법 제.개정이 이뤄지지 않고선 정책을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 전문가들은 일부 파행 사례로 인해 당정협의의 효용 자체가 부정돼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행정부의 정책이 수립돼 시행되기 전에 정당과의 협의를 거치면서 일반 여론과 민심을 수렴하는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문제는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당리당략이나 소속 기관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기관 이기주의'에 있다는 지적이다. 핵심 부처 장관을 지낸 민주당의 또다른 중진 의원은 "행정부 입장에서 당정협의를 하는 동안 여론에 휘둘리는 여당의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며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아는 행정과 정치 관행의 확립이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김영근 기자 yg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