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아시아경제'] (4) 기로에 선 싱가포르..外資 핵심사업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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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손 구함.월 급여 1천1백~3천9백 싱가포르달러(1달러=1.83싱가포르달러)".
지난 달 스트레이츠 타임스를 비롯한 싱가포르의 주요 신문들에 이런 광고가 실렸다.
해운업협회가 낸 선원모집 광고.
채용 예정인원은 8백여명이었다.
광고를 보고 취업을 신청해 온 내국인은 5백80여명 뿐이었지만,협회측은 "성공작"이라고 자평했다.
해운업협회의 헹 치앙 니 회장은 "만족스런 수준은 아니지만,솔직히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말했다.
선원직은 일이 고된데다 급여도 은행 전자회사 등 다른 업종의 평균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어서 싱가포르인들에게 기피 대상이기 때문이다.
3만여명에 달하는 싱가포르 해운업계의 선원 가운데 60%를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등 외국인들이 채우고 있을 정도다.
해운협회측은 경기 불황의 골이 깊은 만큼 내국인들 가운데 선원직 지원자들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도있다.
윤광덕 KOTRA 싱가포르무역관장은 "해운업계의 성공담은 요즘 싱가포르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 침체에 빠졌는지를 거꾸로 비춰주는 반사경"이라고 말했다.
이 나라는 지난 3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 5.6%로 뒷걸음질하는 등 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에 처해 있다.
올 전체로는 마이너스 3%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한국이 외환위기에 강타 당해 마이너스 6.7% 성장의 치욕적 성적을 냈던 98년에도 0.4%로 플러스 성장을 유지했었다.
탄탄해 보이기만 했던 나라가 왜 돌연 '날개없는 추락'의 덫에 걸린 걸까.
이곳 전문가들은 이 나라의 주력 산업인 IT(정보기술)의 세계적인 불황에 미국 등 주요 수출시장이 침체에 빠지는 '이중 악재'가 겹친 것을 최대 원인으로 꼽는다.
인구 4백만명 남짓에 불과한 싱가포르는 국내총생산(GDP)의 80% 이상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고 전자산업이 제조업의 49.4%(2000년 기준)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악재'의 타격이 결정적이라는 얘기다.
이같은 타격은 실업률 급증으로 즉각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까지만 해도 2%(계절조정치)에 불과했던 실업률이 9월 현재 3%로 치솟았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와 함께 최근 내수 진작을 위해 22억 싱가포르달러의 재정을 긴급 투입키로 하는 등의 경기부양조치를 발동했다.
그러나 이런 대책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경제를 되일으킬 수는 없다는 데 이 나라의 고민이 있다.
"미국 등 주요 시장과 IT 경기가 되살아나는 것만이 유일한 즉효약"(초이 킨 멍 싱가포르대 교수)이라는 진단이다.
하지만 싱가포르 경제를 한꺼풀 벗겨보면 보다 심각한 '외부 의존'현상이 발견된다.
이 나라의 핵심 산업이 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국책 산업으로 관리하고 있는 조선 해운 등 극소수 업종을 제외하고는 금융 증권 전자 등 이 나라 산업의 거의 대부분이 외국계 다국적기업들의 손아귀 안에 있다.
미국 포천지가 선정하는 세계 5백대 기업 가운데 3백50개사 이상을 비롯 무려 8백50개가 넘는 외국 기업들이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다.
투자와 마케팅,고용 등 주요 의사결정 권한이 싱가포르인이 아닌 이들 다국적 기업의 본사에 쥐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싱가포르 산업의 '하청 기지화'는 요즘 같은 복합 불황기 때 그 취약점이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다국적 기업들이 수출 부진 등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단행,대대적인 인원 정리에 나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최근 컴퓨터 디스크드라이브 제조업체인 미국계 맥스터사가 7백명을 전격 해고한 것을 비롯 IBM,내셔널 세미컨덕터,루슨트 테크놀로지,게이트웨이,3콤,후지쓰,히타치,메릴린치,스미토모미쓰이은행 등 다국적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실직자들이 줄을 잇고 있지만 "싱가포르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싱가포르 상공회의소의 탄 이 쿤 조사국장은 토로했다.
후발 공업화 단계에서 핵심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국적 기업을 육성하는 대신 해외 선진국의 다국적 기업을 유치,압축 성장을 일궈내는 '보완(complementing) 전략'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탄 국장은 "국내 실물경기의 회복을 거의 전적으로 '외세'에 의존해야 한다는 게 싱가포르 경제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