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貨가 있는 풍경' .. 정규재 <경제부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장면1."결국 미국 대표가 메모지에 무엇인가를 써서 내밀었습니다.
최후 통첩이었어요"
일본 고위관리가 1985년 플라자 합의 과정을 회고한 내용중 한 장면이다.메모지엔 암호처럼 '125'라는 숫자만 쓰여있었다.
달러당 2백50엔대에서 움직이던 엔화였으니 환율을 절반으로,다시 말해 일본 상품 가격을 2배로 끌어올리라는 것이 미국의 요구.제이(J)커브 효과같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엔화는 이후 일관되게 강세 행진으로 치달아갔다.
10년이 지난 95년 봄, 엔화는 뉴욕시장에서 79엔의 역사적 고점을 기록했다.
장면2.미국이 엔화를 목졸라가던 즈음 진행된 또하나의 시도.폴 볼커가 미국 FRB의장으로 기세를 올리던 86년의 일이었다.
이 해에 볼커의 제안에 의해 'BIS비율'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탄생했다.
수년간의 토의를 거쳐 91년부터 시행된 BIS비율은 당초 의도대로 일본 금융회사들을 국제금융시장에서 쓸어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노무라 미쓰비시 등 일본의 빅 네임들은 가을바람의 낙엽처럼 떨어졌다.
일본 금융은 BIS를 통해 강해지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걸었다.
엔 시장이 협소했기 때문에 채권을 인수하면 전량 떠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BIS비율은 악화됐다.
한국도 지금 이 함정에 빠져 있다.
한국의 기관투자가는 유가증권을 줄기차게 팔고 있다.
장면3.클린턴은 월스트리트로부터 금융전문가를 특채해 재무장관에 앉혔다.
가냘픈 몸매에 온건한 인상의 로버트 루빈.그가 재무장관에 취임한 95년 1월부터 개도국의 재앙은 시작됐다.
까마귀 날면 언제나 배는 떨어졌다.
루빈은 달러강세를 추진해갔고 엔은 1백40까지 되밀려났다.
이 되밀림이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에 엄청난 무역적자를 안기면서 차례로 외환위기로 끌고갔다.
95년 멕시코의 재판이었지만 아시아 다음엔 브라질과 러시아가 차례를 기다렸다.
미국은 워싱턴과 월가의 결합,소위 금·정(金·政)동맹으로 하늘을 찌를 태세.
선진국의 하청기지화 전략을 채택해왔던 싱가포르 등 일부를 제외하면 모든 개도국들이 IMF의 뭇매를 맞았다.
하청기지화를 위한 사랑의 매? 아니면 잠재적 경쟁자의 씨를 말리는 초토화 작전?
일본은 '엔 국제화''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을 내걸었으나 가장 먼저 아시아에 풀어놨던 돈을 회수해 갔다.
장면4.부시는 금·정 동맹을 산·정(産·政)동맹으로 바꾸어놨다.
테러전쟁이 터지고 세계가 엎드렸다.
일본은 IMF의 금융지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통화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지금 일본의 노선이다.
가련하게도 '거꾸로 보는 만화 경제학 시리즈'.일본은 중국 위안화의 인위적 약세를 엔저(低) 명분으로 삼고도 있다.
가련한데 더해 추한 모습이다.
신경제가 퇴조하면서 올해는 대만 싱가포르 등 다국적 기업의 하청기지들이 타격받고 있다.
독자생존 모델을 추구했던 한국은 그나마 한숨을 돌리는 상황.IMF위기 당시와는 상반된 구도지만 개도국 침몰이라는 결과는 같다.
싱가포르는 당했고 한국은 빠져나간 2001년.그러나 한국의 관료와 학자들은 IMF 처방전을 지금도 금과옥조로 생각한다.
장면5.강대국은 후진국 상품을 수입하면서 자국화폐를 수출한다.
무역적자의 구조화다.
일본은 언제나 흑자를 낸다.
그래서 아시아인의 수중엔 엔화가 없다.
그 때문에 아시아에서조차 엔의 국제화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일본의 도량이 좁다.
스스로의 비극이고 이웃된 자의 고생이다.
한국내 페론주의자도 문제지만 아무래도 엔화가 또 한번 우리를 괴롭힐 것 같은 연말이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