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대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낸 야당 출신 L씨는 6년전 당무회의의 기억에 아직도 씁쓸함이 남아 있다. 당시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정책사안에 대해 자신을 포함, 대부분의 당무위원들이 반대했지만 '보스'의 한마디에 모두 찬성으로 돌아선 것. 그 이후 그는 정당민주화를 강하게 주장, 충돌을 빚은 끝에 3선에 실패하고 정치권을 떠나야 했다. 굳이 L씨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국내 정당의 역사는 '제왕적 총재'에 의한 1인지배 정당의 대물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공화국의 자유당시절에서부터 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당들은 총재 1인의 판단에 의해 모든 것들이 결정되는 '인물 정당'이었다. 이념이나 정책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여 당을 만들기 보다는 한 사람의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붕당을 이뤄 왔다. 때문에 보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신당이 만들어지거나 다른 당과 합쳐지는게 다반사였다. 제1,3,5공화국의 자유당 공화당 민주정의당 등은 집권자가 권력 기반으로 이용하기 위해 당을 만든 경우. 1990년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통합한 이른바 3당합당은 권력 분점을 노린 주요 보스들의 합작품이었다. 현 여당도 수차례 반복된 분당과 합당을 통해 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통합)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으로 탈바꿈했지만 정책이나 이념이 달라지기 보다는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데 그쳤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보스의 생각에 반기를 든 정치인들은 L전 의원의 경우 처럼 철저히 '왕따'를 당해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회의원들은 당 총재 주변을 맴돌며 눈도장을 찍는 데만 신경을 써왔다. '공천'이란 생사여탈권을 쥔 총재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히 국회의원 본연의 임무인 정책 개발과 입법활동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정당의 운영도 인맥 위주로 흐르게 되고 보스의 개인적인 관심사나 몇몇 측근들의 과욕에 의해 당론이 좌우돼 왔다. 89년 동화 동남 대동은행의 허가가 그 예다. 노동자은행 이북5도민은행 등 설립 명분은 거창했으나,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한 전국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 민정당 중진들의 요청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수용한 결과였다. 신한국당 시절 종금사들의 무더기 설립허가 등 금융 자율화는 선진국 진입을 내세운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들 금융회사는 무더기 퇴출되면서 우리 경제에 부담만 지웠다. 정당의 사당화(私黨化)로 합리적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책의 연속성이 떨어졌고, 새로 들어선 집권세력의 무리한 정책 추진이 이어진데 따른 필연적 결과다. 물론 매번 선거때마다 이러한 보스정치의 틀을 깨자는 논의는 있었다. 가깝게는 '젊은 피' 선풍을 일으키며 16대 국회에 입성한 '386세대'들이 교차투표(크로스보팅)를 요구, 국민들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의원총회에서 총재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냈던 대부분의 386세대 의원들은 주의의 핀잔만 듣게 되자 "다른 의견을 내기가 조심스럽다"며 몸을 사리고 있는 형편이다. 때문에 정책정당으로의 발전은 정당민주화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경남대 심지연 교수는 "특정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정책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는 정당체계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