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통합(SI)업체인 A사의 한 신규 사업팀.선배로 보이는 직원이 젊은 사원 앞에 회로도를 펼쳐놓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젊은 사원은 올해초 입사한 신입사원 B씨(27).산업공학을 전공한 B씨는 정식근무 1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현업을 맡지 못한 채 교육을 받고 있다. 대학에서 배운 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다. 이 회사의 한 팀장은 "공대 출신들이 기초적인 회로설계조차 읽지 못하는 상태에서 들어온다"며 "적어도 1∼2년 정도 업무를 익히며 재교육을 받아야 업무를 맡길 수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대졸자들의 취업난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대기업들의 경력직 선호 문화가 유례없는 '취업대란'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구직자들의 볼멘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 이모씨(26)는 "대기업들이 이 기업,저 기업 널뛰듯 다니는 경력직 사원들만 뽑으니 정작 대졸자들이 일할 곳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LG구조조정본부 인사지원팀의 박해정 과장은 "대기업마다 각 사업부의 독립성과 채산성을 강조하다 보니 바로바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는 경력직 사원을 우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SK텔레콤 인사팀 관계자도 "경영환경이 워낙 빠르게 변하다 보니 대졸 신입사원을 뽑아 1∼2년 교육시킨 뒤 현장에 투입하는 방식으로는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밝혔다. 취업전문가들은 이같은 신규채용 축소의 이면에는 대학 교육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진공관 시절의 교수가 반도체 시대의 학생을 가르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지난해말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기업 인사담당자와 신입사원 등 9백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의 대학교육 만족도 조사'에 따르면 인사담당자의 40.7%가 '대학에서 가르친 지식과 기술 수준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많이 못 미친다'고 응답했다. 신입사원들 또한 같은 질문에 65.4%가 '차이가 많다'고 응답해 대졸 사원 스스로 대학에서 제대로 실질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국내 대학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비즈니스 환경에 적합한 인재양성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다는 점을 손꼽았다. 미국의 경우 MBA(경영대학원),로스쿨(Law School)등 구체적인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재양성기관이 있지만 국내 대학은 일반화된 학문분과로 체제가 편성돼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17일 전경련이 펴낸 '산업기술 인력 현황과 과제'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이 매년 채용하는 신규 기술인력 7만명의 재교육비는 2조8천억원에 달한다. 보고서는 교육기간 중 실무에 투입하지 못하는 기회비용까지 감안하면 국가적인 손실은 더욱 불어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대졸신입사원 2천5백명에게 3개월간 교육시키는데 70억원을 들였고 SK텔레콤도 신입사원 3개월 평균 교육비가 1인당 1천만원에 달했다. 전경련의 이인렬 상무는 "산업현장의 기술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론 중심의 보수적인 대학교육 때문에 인적자원의 질이 떨어져 기업의 재교육비가 급증하고 산업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취업전문가들은 대학교육과 산업현장간의 괴리를 줄이고 대졸자들의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선 대학교육시스템의 획기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