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22) '보각 스님(통일정사 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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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높은 하늘에서 나온건 아니예요.
5대 고등종교가 다 땅에서 나왔지.5색 인종이 남이 아니라 같은 형제입니다.
그런 걸 모르고 서로 적인 줄 알고 있어요" 백수(白壽)를 코앞에 둔 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노스님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팔당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 자락의 통일정사(統一精舍).비구니 보각(寶覺.97)스님이 30년 넘게 수행해온 곳이다.
보각 스님은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한 몸으로 고스란히 다 겪은 역사의 "증인"이다.
1904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유관순 열사와 함께 이화학당을 다녔고 3·1만세운동도 함께 했다.
이화여대를 나와 동경제대(중퇴)에 유학한 신여성이요 엘리트였으며 일본인이 통치하는 하늘 아래에선 살 수 없다며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대처승을 몰아내는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고 정화운동이 마무리되자 지난 58년 머리를 깎고 입산했다.
하계륜 스님(비구니)이 은사,정화운동의 주역이었던 하동산 스님이 계사(戒師)다.
질문을 종이에 써 보여줘야 할 정도로 귀가 어둡지만 유관순 열사와 함께 생활했던 이야기를 꺼내자 보각 스님은 "관순이?"라며 반색한다.
"한 방에서 5년을 같이 있었어요.
관순이는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위고 학년은 하나 아래였어요.
관순이는 성격이 나하고 똑같았는데 우리 별명이 '벼락대신'이여.내 혈액형이 O형이고 관순이도 아마 O형이었던가봐.만세운동을 앞두고 종이와 물감을 사다가 밤새 태극기를 함께 그렸지요"
보각 스님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역사산책을 하는 것 같다.
김좌진 장군은 보각 스님의 속가 아버지와 의형제였고 김두한 전 의원은 보각 스님을 친누나처럼 모셨다.
이승만 정권 때 이기붕 총리의 부인 박마리아는 보각 스님의 이화학당 동기생이고 여성운동가 김활란은 의형제 형님이다.
3세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보각 스님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스물네살 때 결혼했는데 당시 보성고보 교무주임이던 남편(장석철·1935년 작고)이 독실한 불교신자였어요.
하나님을 배반해서 벌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남편이 두 종교를 비교해가며 차근차근 불교의 교리를 설명해줬지요.
불교의 가르침이 이토록 심오한 줄 몰랐기 때문에 참 놀랐어요"
그러나 불교 입문 후에도 스님이 되기까지는 숱한 곡절과 파란을 겪어야 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과 중국에서의 군 자원입대,한국전쟁을 전후한 세 아들의 죽음,모진 린치까지 당하며 앞장섰던 불교정화운동….그 중에서도 불교정화운동은 보각 스님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난리(6·25)가 끝난 뒤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가 외국의 귀한 손님에게 우리 문화를 보여준다며 정릉의 경국사로 데려갔어요.
대처승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세수도 안 한 채 고기에 생선을 놓고 술을 마시는 거라.빨래줄엔 애기 기저귀가 죽 걸렸고.이 박사가 창피를 당하고 나와서는 대처승은 절을 떠나라는 불교정화유시를 내렸지요"
정화운동 당시 비구와 대처승측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보각 스님은 비구승의 편에 섰다.
석가모니가 결혼도 하고 아들도 있었지만 출가 후에는 독신으로 지냈으며 아들 아내 다 데리고 성불한 것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불교계에서 보각이라는 법명보다 '이정수'라는 속명으로 더 유명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출가의 계기도 이 때 마련됐다.
"조계종을 만나고 나서 늦게서야 중이 됐어요.
정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을 때 방보문 스님이 '세상 그만 살라'며 출가를 권유해 머리를 깎았지요.
그런데 중 된 지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불국사에서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남들은 머리 깎고 10년 만에 주는 구족계(비구니계)를 석달 만에 받았지요"
보각 스님은 지금도 스승인 동산 스님을 잊지 못한다.
방에 '堪忍待(감인대?참고 기다리라)'라는 액자와 함께 동산 스님의 사진을 걸어 놓은 것도 그래서다.
스님은 "우리 스님(동산 스님)은 덕망있고 따뜻한 분이었다"며 "조계사 입구에 들어설 때 훈기가 있으면 동산 스님이 계시고 찬바람이 나면 범어사로 가시고 없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마음을 몰라요.
마음을 알면 마음으로 살 수 있어요.
지금 백인하고 흑인이 갈등하지만 지구상의 오색 인종이 한 몸뚱이인 걸 알아야 돼요"
때문에 보각 스님은 "마음을 잘 써야 하며 남을 미워해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미워하는 마음은 결국 자신에게도 해를 끼친다는 것.스님도 신도들 가운데 3명이 서로 다투는 걸 보고 속이 상하고 미워하다 크게 앓았으며 그 뒤로 귀가 어두워졌다고 했다.
통일정사라는 절 이름에도 남북통일은 물론 세계평화와 이 세상의 통일을 염원하는 큰 뜻이 담겨 있다.
'홍익인간의 정신은 곧 불교의 자비사상'이라며 단군을 선양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천당과 지옥이 먼 데 있는?아니라 다 이 땅 안에 있다"며 "마음을 잘 써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노스님의 자세가 꼿꼿하다.
지금도 새벽 예불과 좌선,공양을 규칙적으로 하고 간단한 빨래는 손수 할 정도로 부지런하다고 손상좌인 주지 은정 스님이 귀띔해준다.
해가 진 산사를 나서는데 노장이 차마 문을 닫지 못한 채 또 당부한다.
"마음을 잘 알고 잘 써야 해요"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