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수원지법이 내린 판결은 지금까지 형식적인 기구나 다름 없었던 이사회에 대해 '경영상의 실질적 책임'을 물었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재판부는 이런 관점에서 이사들이 경영 판단을 잘못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면 배상을 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이에 대해 현실을 무시한 판결이라는 볼멘 소리가 나오고 있다. 비자금이나 계열사와의 거래 관계에서 발생한 불공정 행위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우리나라 경영 관행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는 항변이다. ◇ 사건 배경 및 결정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지난 98년 10월 대표적 상장회사인 삼성전자의 전.현직 이사 10명을 상대로 회사측에 3천5백억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전자 이사회가 지난 88년부터 97년까지 내린 의사 결정중 회사에 명백한 손해를 끼친 것으로 판명된 사안들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였다. 참여연대가 청구한 이사회 손해배상 소송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 행위 △J일보 등과의 내부거래 행위 △부실업체 인수와 그에 따른 출자 및 지급보증행위 △계열사 주식의 매도를 원인으로 한 행위 등 총 네 가지였다. 이 가운데 법원은 뇌물 공여와 부실업체 인수, 계열사 주식 매도로 인한 손해만 인정했다. 이사회가 의사 결정과정에 참여한 것이 분명한 이상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입장이다. ◇ 파장 =이번 판결은 지난 97년 제일은행 전.현직 이사들을 상대로 한 주주대표소송에 이어 두번째이며 제조업체를 상대로 한 소송으로서는 최초다. 금액면에 있어서도 제일은행 이사들은 1심에서 4백억원을 선고받았으나 이번 삼성전자 이사들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많다. 외국의 경우 이사회에서 회사와 관련된 중요 사항들이 결정되는 만큼 이사들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실상 오너 1인에 의해 회사가 경영되고 있기 때문에 '이사회 결정 사항'이라는 이유로 이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회계사는 "주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이사가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책임을 지라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아니냐"며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또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영 정책을 결정하는데 사사건건 이사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 회사가 등기이사를 선임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이사의 사법적 책임을 묻는데에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 향후 전망 =전문가들은 앞으로 유사 소송이 빈번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자본금 1천억원 이상 상장기업에 대한 주주대표 소송 요건이 지난 97년 자본금의 0.25%에서 98년 0.01%로 완화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년부터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이 발효될 예정이어서 기업을 감시하는 주주들의 눈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한 기업 변호사는 "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판결"이라며 "이른바 재벌 기업문화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는 이례적이지만 소액주주들이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서욱진.정대인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