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치하 한 시절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고,신문들도 쓰고 싶은 기사를 다 쓰지 못했다. 독자들은 미처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진 행간(行間)의 뜻을 찾아 읽기에 바빴다.거기에서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카더라 통신''이 만연하며 세상은 불신과 몰가치적 허무주의 풍조에 물들어갔다. 요즘은 어떤가. 사람들이 사실을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하려 하지 않고,신문들도 취재원이 불분명한 ''추정보도''와 ''소문 부풀리기''식 기사 쓰기를 일삼는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려울 듯 싶다. 그래서 독자들이 그 말과 기사의 거품을 걷어내고 속에 숨은 진실을 찾아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옛날과 거의 다름이 없다. 사람이고 신문이고 다른 사람 말을 못 믿고 자신까지 믿기 어려운 세상 풍조가 여전하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새삼스럽게 되새겨보게 되는 것이 세상살이에 있어서 ''믿음의 덕목''이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 사람들이 서로 믿음을 잃으면 우리 공동체의 삶은 무너지고,개개인의 삶도 함께 설자리를 잃고 망가지게 마련이다. 믿음을 잃은 삶이 어디에 설자리가 있고 중심이 있겠는가.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원동력이자 중심자리의 덕목임이 분명하다. 제 삶의 중심과 믿음을 함께 잃고 허둥대는 모습과 관련해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필자가 가까이 지내는 영문학자 J교수는 미국 유학시절 어느 날 논문 자료를 찾으러 학교 도서관엘 들어갔다가 일을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채 폐관 시간을 넘겨버려,출입문이 잠긴 서고 안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는 전깃불이 꺼져 캄캄한 상태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애를 쓰다 탈진상태가 되고 말았는데,그 때 어느 서가 사이로 가느다란 촛불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가워 그 곳에 가 보니 웬 여자 한사람이 역시 ''갇혀 있는 처지''였다. 나처럼 낭패를 당한 사람이 또 있구나 하고 생각한 J교수는 두사람이 함께 ''탈출''할 방도를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판단은 착오였다. "내가 왜 갇혀요? 나는 이 조용한 곳에서 밤샘 공부를 하기 위해 일부러 숨어 남아 있는 거예요" J교수 제의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 말에 문득 깨닫게 된 J교수도 촛불을 하나 얻어 밤새껏 남은 일을 끝내고 나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과연 그러할 것이다. 자기 자리와 믿음을 잃지 않고 제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해 나간다면 어떤 열악한 조건도 그 도서관의 여자나 J교수처럼 밝고 생산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고,또 그의 삶과 이 세상까지도 능히 창조적으로 변화시켜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신과 가치관 몰락 현상은 원인을 따지자면 일부 부정 권력층 인사들과 부도덕한 기업인 등 부패한 유력계층의 탐욕과 몰염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치에서 보듯이 부정 비리 나눠 갖기를 그치지 않은 채 서로 상대방 헐뜯기에만 열을 올리는 한, 또 거기에 연유해 ''나만 믿으면 손해 본다''는 불신풍조가 변하지 않는 한 그런 현상은 저절로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세상이 함께 썩고 우리 삶이 함께 무너져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그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무고한 시민들이라도 거기 함께 휩쓸리고 물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흔들림 없는 자기 가치관을 지니고 불의한 세태에 휘둘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 삶과 세상의 주인 되는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고,그 주체성의 중심자리인 자기 믿음부터 회복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직 우리 주위에는 부정하고 몰염치한 인간들보다,자기 삶과 공동체 사회의 원칙을 꼬박꼬박 지키며 맑고 화창한 삶을 함께 하고 싶어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훨씬 많으리라는,그 세상에 대한 자기 믿음부터. 젊었을 적부터 60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수십년 동안 한 여자 모델만을 그리며 함께 늙어가고 있는 화가 친구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선행하는 주변 사람들의 숨은 미담도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우리 주위 사람들의 자신과 이웃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이 필경 이 세상까지 참되고 크고 아름답게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