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경제' 25時] (3) '상처뿐인 벤처밸리' .. 툭하면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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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주변기기를 개발하는 벤처기업 A사의 이 사장은 얼마전 한 공무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요즘 소식이 통 없어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이 사장은 해당 공무원이 전화를 한 이유를 눈치채고 서울 외곽의 맥반석 불가마 집에서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조그만 속옷가방을 준비한 이 사장은 불가마 탈의실에서 그를 만난뒤 주위를 살폈다.
그는 "속옷이나 갈아 입으라"고 말하며 가방을 해당 공무원에게 얼른 전달했다.
가방엔 속옷 대신 현금 5백만원을 넣었다.
이 사장은 "무자료 거래가 많은 탓에 공무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며 "일년에 서너차례는 007 작전과 같은 식으로 돈을 건넨다"고 털어 놓았다.
콘텐츠 관련 벤처기업인 B사의 김 사장은 벤처투자 관련 회사인 모 업체로부터 5억원을 투자받았다.
김 사장은 투자금액의 3%인 1천5백만원을 심사역에게 건넸다.
담당자가 은근히 돈을 요구해와 이리저리 알아본 그는 3%의 커미션이 적정선이라는 얘기를 듣고 돈을 마련했다.
김 사장은 "사례비를 주지 않을 경우 투자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일어날 수도 있다"며 "부당한줄 알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하소연했다.
납품 관련 비리도 종종 발생한다.
벤처기업 D사의 서 사장은 자체 기술로 개발한 여과장치를 대기업에 시험 설치해 4개월 동안 테스트받았다.
직원 3명이 밤을 새가며 성능시험을 받았다.
하지만 "테스트 후 구매하겠다"던 약속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 사이에 다른 회사 제품으로 결정됐으니 물러나는게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 사장이 훗날 알아보니 테스트를 하고 있는 동안 경쟁업체에서 뒷거래를 했고 그 결과 예상밖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테스트 비용만 3억원 이상을 날렸다고 흥분했다.
이들 세 가지 사례는 벤처업계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그만큼 벤처기업을 둘러싼 부패가 심각하고 경영환경이 열악하다는 증거다.
실제로 서울 강남 테헤란로 주변의 벤처기업 사장들에게 물어보면 이같은 경험을 갖고 있고 또 유혹을 받은 기업인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비리의 일차적인 책임은 벤처기업인에게 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벤처기업에 돌릴 수 없다고 벤처경영자들은 항변한다.
사회 전반이 부패돼 있고 이런 환경에서 사업을 하다보니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구조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이비 벤처기업인까지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가 전반적으로 맑아지지 않으면 이런 환경에서 홀로 청정하게 사업을 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는게 이들의 푸념이다.
게다가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멀쩡한 벤처기업에까지 불똥이 튀는 일이 생기고 있다.
해외자금 유치가 보류되는 일마저 생겨나고 있다.
보안솔루션 기술을 개발 중인 K사는 일본 투자기관으로부터 10억원을 유치키로 지난해 11월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서울 송파밸리에 위치한 이 회사는 자사의 주식가치 평가를 놓고 현해탄을 넘나들며 구체적인 협의를 하던중 각종 게이트에 이어 패스21 사건마저 터졌다.
그러자 일본측 투자기관에서 투자를 일단 보류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일본측은 자사의 투자 포트폴리오 재조정 과정에서 K사에 대한 투자를 잠시 미루기로 결정했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이 회사 재무담당 임원은 "패스21 사건까지 터지자 일본측이 한국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투자유치가 물건너 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1980년대 어려웠던 미국 경제를 견인해낸 주역중 하나는 첨단기술과 도전의식으로 무장한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들이다.
한국 경제의 미래도 밤잠을 줄여가며 기술개발에 나서고 있는 대다수 선량한 벤처기업인이 한 축을 맡고 있다.
이들이 더이상 의욕을 잃지 않도록 벤처기업인 스스로 자중하는 동시에 경영환경을 개선해주는 일이 시급한 시점이다.
김문권.이계주 기자 m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