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26) '법공 스님(도안사 조실)'..사람노릇 제대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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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끝자락,수락산이 온통 눈(雪) 천지다.
밤새 내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럽다.
절에서 보내준 트럭이 아니었으면 고생 깨나 했을 성 싶다.
절 앞의 가파른 산길에선 트럭도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조심조심 계단을 밟아 오르려니 저만치 입간판이 하나 보인다.
"산불조심" 간판이겠거니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청담조사의 어록이다.
"마음이란 이 우주를 지배하는 무한한 힘이요,자연의 길이다.
이처럼 참되고 묘한 것도 없다..."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니 또 속세의 삿된 마음을 경책하는 간판이 마주선다.
"…사흘 닦은 착한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동안 탐내어 쌓은 물건 하루 아침에 티끌이 되느니라" 야운 스님이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첫 구절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다.
계곡물을 가로지른 아담한 연화교를 건너 계단을 다 오르자 도안사다.
설유(雪乳·1858∼1903)-한영(漢永·1870∼1948)-운허(耘虛·1892∼1980)로 이어지는 불교의 강맥(講脈·강원 강사로서의 맥)을 잇는 이곳 조실 법공 스님(法空·84)의 수행처다.
법공 스님은 운허 스님의 강맥을 이은 월운(봉선사 조실) 지관(가산불교연구원장) 묘엄(봉녕사 승가대학장) 스님들 중에서도 가장 위다.
대웅전 옆 건물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노장이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노구에 감기로 며칠씩 고생한 사람 치고는 괜찮아 보이는 목소리다.
눈 덮힌 바깥 풍경이 절경이라고 감탄하자 노장도 맞장구를 친다.
"수락산에서도 이 절이 가장 좋아.이 너머 흥국사가 제일 크긴 하지만 풍경이나 절맛은 여기가 낫지.근방에 민가도 없고…"
그러면서 노장은 지난 95년부터 머물고 있는 도안사를 지금처럼 가꿔놓은 조카 상좌 혜자 스님(도선사 주지)을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강맥에 대해 묻자 노장은 ''강원총람''에 실린 강맥도를 보여주며 소상히 설명해준다.
"내가 법주사 불국사 백양사 화엄사 등 4곳의 강원에서 한 20년 강사를 했어.옛날에는 각 절에서 강맥을 상당히 따졌어.(강원총람의 사진을 보여주며)이게 내가 우리 법사 박한영 스님하고 찍은 사진이야"
법공 스님은 ''삼수갑산''의 본고장인 함경도 삼수에서 태어나 스무살 때 봉선사에서 운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절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공부를 좀 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일까,서울 개운사 대원암과 봉선사에서 당대의 대강백이던 박한영 스님과 운허 스님한테 경전을 배우는 복을 누렸다.
경전공부를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을까.
노장은 교(敎)와 선(禪)을 모두 강조한다.
"경도 글자에 집착하지 말고 진짜로 바로 보면 왜 못깨달아? 옛날엔 강사 스님들이 경으로 깨달아 얼마나 큰스님이 많이 됐는데….그러나 경학을 한다고 참선에 반대하면 못써.참선은 바로 가는 것이고 경은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따라가는 것인데 근기에 따라서 해야지.나는 경을 하지만 항상 참선을 해.우리 노장님(박한영 스님)도 그랬어"
법공 스님은 수많은 경전 가운데 화엄경을 최고로 친다.
"팔만대장경이 화엄경에 다 집결돼 있다"는 얘기다.
"부처님이 팔만사천 법문을 벌어놨지만 결국은 마음 하나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야.아무리 법이 많아도 마음밖에 딴 건 없어.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는 거야.마음을 깨달으면 그게 끝이야"
어떻게 하면 마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
노장은 "마음을 보도록 노력 해야지 공짜는 없다"며 실천을 강조한다.
"나의 행동이 열 사람을 살릴 수도,죽일 수도 있을 때 사람들은 열 사람을 죽이더라도 내게 이익이 되면 그렇게 하려고 들지.그러나 그건 복을 버리는 거야.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열 사람 살리는 쪽으로 가야지"
노장이 이렇게 실천,행(行)을 강조하는 것은 인과법 때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내가 복을 받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누구를 죽였으면 금생에는 그 사람한테 죽게 돼있고 불효하는 자식들은 전생의 원수가 들어와서 아들이나 손자가 된 것이라고 한다.
"젊은이도 앞으로 나쁜 원인은 짓지 마.좋은 원인만 짓고 살겠다고 오늘이라도 결심을 해.지혜롭게 살려면 욕심을 부리지 마.욕심이라는 게 허망한 거야.내 몫 이외에 남의 것을 침범하면 오래 못가.
그러나 마음의 복을 지으면 끝이 없어"
노장의 방 주위엔 온통 글씨들이다.
화엄경 서문을 쓴 병풍과 금강경을 쓴 액자,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마음이 항상 대광명을 방출한다는 뜻)이라고 쓴 글씨 등.노장이 한영 스님에게 어깨 너머로 배운 글씨다.
그 중에서도 사람 인(人)자 4개를 세로로 쓴 글씨가 눈에 띈다.
노장의 뜻풀이가 재미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사람 노릇을 해야 참사람이지"
하루 시간표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일어나서 참선하다 예불하고 책이나 신문을 보고 잠 오면 잔다"고 했다.
문 밖엔 까치소리가 요란하다.
노장은 "까치 네 마리가 찾아와 까마귀집을 빼앗느라 싸운다"며 "저 놈들이 다 나의 도반(道伴)들"이라고 했다.
눈꽃 속의 산사가 더없이 평화롭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