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강정원 도이체방크 한국대표가 서울은행장으로 취임했다. ''해외매각 성사''를 특명으로 부여받은 그는 취임하기가 무섭게 대대적인 조직 물갈이 작업에 나섰다. 옛 서울은행 출신으로는 김규연 부행장 한 사람만 빼고 기존 임원을 모두 교체했다. 장형덕 부행장, 김명옥 상무 등으로 새로운 진용을 짰다. 미국계 금융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한국계 전문가, 이른바 ''코메리칸(Komerican)''의 은행 점령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미은행이 그 뒤를 이었다. 대주주인 미국계 칼라일펀드의 후원을 업고 하영구 씨티은행 한국지점장이 지난해 5월 한미은행장으로 임명됐다. 하 신임 행장은 씨티은행에서 함께 일했던 박진회 강신원 원효성씨 등을 부행장으로 한꺼번에 영입했다. 이들은 모두 40대. 실무팀장급까지 추가로 외부에서 수혈했다. 해외파들의 득세가 확산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인 지난 97년 초만해도 16개 시중은행에서 단 1명이던 해외파 임원이 현재 13명으로 늘어났다. 이중 씨티은행 출신이 10명에 달한다. ''씨티은행이 한국 은행가를 점령했다''는 우스개는 괜한 소리가 아니다. ''해외파=유능력자=선(善)''이란 공식이 암암리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이들이 외환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국내 은행가에 참신한 바람을 몰고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권위와 형식'' 대신 ''능력과 실적''을 중시했다. 은행에 해(害)가 되는 일이다 싶으면 아무리 정부가 ''압력''을 넣어도 ''안된다(No)''란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단도 보였다. 그러나 이들 코메리칸의 ''활약''에 대해 아직까지는 우려섞인 시선이 더 짙다. "해외은행 시스템은 선진적이고 국내 은행의 경영방식은 모두 낙후돼 있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가 은행권을 지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서민호 한미은행 노조위원장)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더욱이 새로 행장이 된 사람들은 거대한 은행을 경영해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다. 미국계 은행 서울지점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래선지 은행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강 행장은 자신의 임무로 주어진 ''서울은행 해외매각''에서 현재까지 낙제점을 받고 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은행 상황은 개선됐다지만 서울은행은 여전히 ''합병과 매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금융 구조조정의 골칫덩어리로 남아 있다. 하 행장 역시 주주의 입맛에 맞게 주가 올리는데만 몰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외IR에만 치중할 뿐 은행 경쟁력 강화는 뒷전이라는 것이다. "모터보트를 몰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항공모함 함장이 되다보니 함장보다는 기관사 역할만 하고 있다"는 폄하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다. 코메리칸 출신 임원들의 행태도 문제다. 강 행장이 불러들인 코메리칸들은 하나 둘씩 은행을 떠났다. 씨티은행 출신 장형덕 부행장은 교보생명으로 옮겨갔고, JP모건 경력이 있는 배전갑 부행장은 개인적 사유로 1년도 못돼 그만뒀다. 금융계에서는 이들이 국내 은행 근무를 ''경력관리''용으로 이용만 한다고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코메리칸들의 국내 은행 점령이 선진 경영시스템을 수혈시켜 주는 등 소기의 결실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아직까지 물음표일 수밖에 없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